교감 일기(2018~)

2020년 11월 13일

멋지다! 김샘! 2020. 11. 13. 21:25

오전에는 원어민 협력교사 수업 심사가 있어서 출장이었고 오후는 좀 쉬고 싶어서 조퇴했다. 교감이 되면 수업이 없어서 불편한 감정 없이 조퇴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다. 앞으로는 남의 감정이나 눈치에 좌고우면 하는 삶보다 내 감정과 양심에 충실한 삶에 더 무게를 둘 것이다.

원어민의 발음이 너무나 또록또록하여 비영어권에서 온 줄 알았는데 협의회 시간에 말하는 것을 듣고 학생들의 수준을 고려했음을 알았다. 평소에도 학교와 원어민 보조교사의 협력이 잘 된다 하였고, 학생들의 참여와 반응, 협력교사의 적절한 개입이 이상적이었다. 협의회 말미에 박근혜 정부에서 만들어진 선행학습 금지법 때문에 학교의 영어 시간은 흥미를 유발하는 동기유발 시간이 되었고 학원 수강이 영어회화능력을 강화하는 본시 수업이 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사실 학습에서 선행학습과 심화학습은 습자지 한 장 차이만큼 구분 짓기 어렵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처음 발령받은 지역이고 좋아하는 막걸리 양조장이 있어서 우회했다. 추억이 된 그 옛날의 고갯길의 감흥은 차오르지 않았지만 발령 동기들과 재미있게 지냈던 장면들로 채워졌다. 자동차가 일으킨 바람에 이리저리 뒹구는, 파란 하늘로 세차게 치솟아 금방 힘없이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늦가을의 낙엽에 정취 된 기운이 양조장 다다라서야 깨어났다.
사람이 없었고 필요한 술만큼 돈을 냉장고 돈통에 넣어두고 가라는 투박한 글씨가 있었다.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문구에는 빨간색 매직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사고자 하는 술은 전주로, 흔히 맑은술이라 하는데 발효한 막걸리 윗부분이다. 최초의 막걸리는 알코올이 12~13% 농도인데 발효된 막걸리 양만큼의 물로 희석하면 우리가 아는 6%의 막걸리다. 다른 양조장에는 물로 희석한 5~6%의 전주를 판매하는데 이 양조장은 13% 그대로를 판매하고 합성감미료 아스파탐이 첨가되지 않아서 들큼한 맛이 덜한 그 옛날 논두렁에서 먹었던 농주와 비슷한 맛이 난다.

정식 발령을 받기 전에 지리산 아래에서 한 달 동안 기간제 교사를 했는데, 어느 날 퇴근을 하는데 모를 심던 학부모들이 막걸리 한 잔 하고 가라고 자꾸 채근해서 어쩔 수 없이 수줍게 한 잔을 얻어 마셨는데 아! 글쎄 13%의 막걸리였다. 한 잔을 후딱 마시고 일어서는데 논흙 묻은 손으로 바지를 당기며 자기 잔도 받으라는데 거절할 겨를이 없었다. 몇 잔을 마셨는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새싹이 돋아난 논두렁의 이슬과 함께 있었다. 털레털레 하숙집에 다 다다라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웃으면서 잘 당했다고 했다. 다음날에 또 당할까 봐 그리고 부끄러워서 얼른 인사만 하고 먼 산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얄궂은 얼굴로 "총각 선생님! 자슥들 잘 부탁하요!"라고 하셨다.

소설인데 지루한 책을 조금 읽다가 한낮에 일기를 쓴다.
저녁에는 아내가 구워주는 홍합땡초부추전과 매향이를 한 잔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