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6일
토요일과 일요일에 산과 도시 하천을 참 많이 걸었더니 일어나는 몸이 무거웠다. 눈을 감고 한참을 침대에서 머물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더니 아내가 "우짠 일로 새벽에 일어나지 않았소!"라고 했다.
토요일, 가파른 산을 올랐다가 가파르게 내려와서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고 있는데 아내가 '인생이든, 산이든 올라가는 것보다 잘 내려오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섣부르게 정상에 오르지 말고 아주 천천히 조금씩 조심스럽게 정상에 오르라고 조언하며, 인생의 정상을 너무 빨리 만들면 그만큼 내려오는 일이 힘들어진다고 했다.
누구나 다 아는 상투적인 이야긴데 막상 실천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다. 조정과 조절이 참 중요하다. 교직생활의 정상은 어디인가? 제도상의 정상이 교직 인생의 정상과 일치될 수 있을까? 제도상의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교직생활의 정상은 존재할 수 없는가? 나는 현재 어디쯤인가? 정상이라면 오르면서 겪은 풍부한 지혜를 오르는 자들을 위해서 어떻게 나누고 있는가? 풍부한 지혜라는 것이 오르는 자들에게 도움이 되는가? 오르는 자들이 오만하여 팔짱 끼고 수수방관하는 삶이 옳은가? 꼭 정상이든 능선이든 산에 오르는, 삶을 영위하는 자체가 인간 존재의 가치가 아닐까? 능선에서 바라본 세상과 정상에서 바라본 세상이 다를지인데 능선에 선 자가 정상에 선 자에게 부리는 만용과 정상에 선 자가 능선에 선 자를 폄훼하는 인간사의 갈등. 숨을 헐떡거리며 땅만 보고 앞뒤 살피지 않고 정상에 오른 이와 천천히 내딛는 한발 한발의 의미를 깨달으며 능선에서 잠시 쉬고 있는 자의 성장을 비교할 수 있을까?
인간에게 정상과 능선이 존재는 하는 걸까?
'이게 정상이야!'라고 깨닫는 찰나의 순간이 있을까?
성장은 지식을 스스로 찾아 깨닫는 태도가 우선이다. 세상에 널린 것이 지식이고 취사선택의 수고를 조금 더하면 많은 성장으로 이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연수부터 시켜달라고 습관적으로 조르며 남 탓하지 말자. 연수하다가 시간 다 보내지 말고 배우면서 실천하자.
다문화교육 연수를 이수했다. 연수와 별개로 결혼만이 목적인 다문화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 후유증이 크다.
우리 지역의 코로나 19가 잘 진정되지 않는다. 확진자의 동선에 포함된 주변인들이 자가 격리되는 상황을 맞이하니 심리적으로 좀 힘들다. 주변인들이 마스크 쓰기를 비롯한 방역 수칙을 잘 지켜서 양성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다.
몇 건을 조정하고, 참고가 될 사항을 듣고 말했더니 머리가 들뜨고 목소리가 커져서 의도적으로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