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3일
어제저녁 꽤 늦은 시간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휴대폰번호로 전화가 왔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교장자격연수 대상자 축하전화가 아닐까라는 마음으로 받았다.
대뜸 "내다! 우리 1반의 희망! 축하한다!"라고 했다.
'익숙한 목소리이긴 한데· · · · · ·', "죄송하지만 누구신지?"
"너 내 번호 저장 안 해났구나! 내다 희동(가명)이"
희동이는 고등학교 3학년 1반 동기이다. 주로 장례식장에서 만나 반갑게 안부 나누는 사이인데, 전화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 희동아!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 이 밤에 어쩐 일로?"
"낮에 필성(가명, 나와 아주 친한 친구로 서울에 산다.)이와 통화하다가 교장 된다는 소릴 들어서 축하하려고."
"연수받고 좀 기다려야 교장 발령 난다. 아직 교장 아니다."
"그게 그거지 뭐!, 교장 될 낀데, 그나저나 플랭카드(플래카드) 하나 걸어야겠는데 오데다 걸꼬?"
"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쪽팔린다! 절대 하지 마라! 내 분명히 하지 말라고 했다!"
"야잇마! 지금 걸라고 하는 게 아이고, 니 발령 나면!"
"그것도 하지 마라! 제발! 좀!"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할 게 아니고, 얼마 전에 동기가 사립학교 교장이 되어서 그 학교에 플랭카드 달고 했는데, 니는 공립학교 교장인데 뭐가 어때서 달지 마라 하노?"
"요새 그런 거 하면 쪽 팔리는 일이다. 하면 웃음거리 된다."
"그래도 달끼다 우리 담임샘도 못한 걸 우리 친구가 할 건데, 교장을 아무나 하나 교장 되는 게 어디 쉽나?"
"그건 맞는데, 그래도 싫다."
"아니! 그래도 할끼다! 3학년 1반 온갖 서러움 다 받은 우리 공업반 아이가? 니가 우리의 공업반의 체면 살렸는데 뭔들 못하겠노?"
"그래, 알았다. 그럼 발령 나는 학교에 달자. 그나저나 부산에서 술 먹나?"
"그럼, 부산 사는 놈이 부산에서 술먹지 어디서 먹겠노?"
"네가 출장이 잦으니까 혹시 다른 곳에서 친구들과 마시는 줄 알고 물어보는 거지."
"부산에서 친구들과 기분 좋게 마시다가 전화했다. 또 연락하자 으잉!"
"그래, 전화번호 저장해 둘게"
우리 고등학교 3학년 1반 동기들의 우정은 남다르다. 다른 반은 상위권 대학을 가기 위한 불어반(제2외국어 과목)이었지만 우리 1반은 지방대나 나처럼 실업 과목이 입시 선택과목인 교육대학교에 가려는 친구들이 모인 공업반이었다. 물론 불어반을 선택했다고 성적이 모두 상위권은 아니었다. 다만 면학 분위기는 달랐다.
우리 공업반은 나처럼 이런저런 이유로 갈 대학이 정해져 있었고 성적도 합격권이어서 하이틴 드라마 속의 학창생활의 낭만이 넘쳐났다. 실제로 우리 반은 1명만 대학 진학을 못하고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이 한 명도 등록을 안 했을 뿐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우리 반이 3학년 전체 면학 분위기를 조진다고 판단했다. 학교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이 항상 우리 반이었다. 많이 맞았다. 나도 대학입시를 얼마 안 남긴 날, 대들다가 엄청 맞았다. 친구들은 속이 시원하다며 위로했지만 나는 선생님께 대든 걸 후회했다. 사실은 내가 처음부터 대들라고 한 게 아니라 함께 대들기로 했는데 몽둥이 든 선생님의 위압 앞에 하나둘씩 핑계 대며 빠져버리는 통에 나만 남게 되었고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덕분에 체중을 다 실어 날리는 손바닥에 볼이 터지도록 맞았다. 다행히 '너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다.
그런 우리 반 친구들도 이제는 돈도 잘 벌고 출세도 하고 자식농사도 잘 지어서 다른 반에 버금간다. 또 고등학교동문회 행사를 주도하는 친구들 대부분은 우리 3학년 1반 공업이다. 그런데도 공부 때문에 받은 고3 공업반의 서러움은 좀처럼 잊히지 않는 모양이다. 어제 전화도 그런 거다.
'플래카드 진짜로 걸면 어떡하지!'
능히 그렇게 할 친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