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6일
12월 3일 한밤중에 나는 한블리를 보고 있었다. 화면에 '비상계엄 선포'라는 자막이 떠서 방송사가 해킹을 당한 줄 알았다. 그것도 큰일이라 해프닝으로 받아넘기기가 힘들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에 대통령이 등장해서 퍼뜩 북한과 전쟁이 난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대통령이 읽어 내려가는 문구가 섬뜻했다. 내가 초등학교-그 당시는 국민학교- 다닐 때 외워서 두 주먹을 불끈 쥔 손을 번쩍 들며 반공 웅변대회에서 외쳤던 원고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가족 단톡방에 큰 아들이 '뉴스 보세요.'라는 글을 남겼다. 둘째 아들이 '뭔 일이래?'라는 글이 이어서 올라왔다.
나는 TV채널을 돌리며 사실인지를 확인했다. 사실이었다. 잠자는 아내를 깨워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고, 미치겠다고 말했다.
야당 대표가 국민들에게 국회를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큰 아들이 전화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국회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였다. 성향상 능히 그럴 아이니까. 얼른 그래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일단 차분히 지켜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잠에서 깬 아내가 서울에 사는 두 아들을 걱정했다.
AI스피커로 라디오를 듣다가 잠깐 졸다가 깼는데 국회에서 비상계엄 해제를 선언했다. 별 탈 없이, 인명사고 없이 비상계엄이 빨리 끝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책임자 처벌로 혼란이 일 것이라는 걱정으로 12월 4일의 새벽을 맞이했다.
라디오의 뉴스 속보와 특집방송을 들으며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평소 출근길 차 안에서는 클래식 방송을 듣는데, 그날은 특집방송을 들으며 학교에 도착했다.
학교는 생각보다 조용했다. 나만 어젯밤의 큰일을 떠들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공무원이니까 이런 일에 입을 꼭 다무는 게 정치중립이니까 그게 몸에 밴 것이다. 나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메신저로 '다면평가 자기 평가서'를 제출해 달라고 하며, '이럴 때일수록 우리 일 차분히 하시고, 복무 처리 더 철저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학생들에게 지금의 난국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지 마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게 공무원이고 직업인으로서 교감인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에서 끓고 있는 울분을 속 시원하게 토해내고 싶었다.
나라의 안위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정치인이 국가보다 직업인 정치인으로서 이 난국을 해석하는 참담한 현실, 나라가 어떻게 굴러가든 정치인으로서의 미래만을 걱정하는 극도의 소시민적 근성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우리 정치판의 모습에 분노를 금치 못하겠다.
당신들에게 나라는 국민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저녁에 끼리끼리 어울리는 고등학교 친구들 송년회가 있다. 모임을 알리는 단특방에 모임을 연기하자는, 그대로 하자는, 무너진 지역경제를 한탄하는, 일이 없어서 3일 일하고 4일 쉬는 현실을 비꼬며 우리나라가 드디어 복지국가가 되었다며 비꼬는, 내년이 더 참담하다는, 남쪽에 사는 친구들아 제발 투표 좀 똑바로 하라는 글이 맥락 없이 쓰였다.
큰 아들과 수능 수시 면접을 보러 서울 가서 박근혜 탄핵 집회에 동참했었다. 큰 아들이 그러고 싶어 했다. 그때에도 아비 된 자의 비겁을 표현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제 큰 아들 학교의 교수와 연구진들이 시국 선언하는 TV화면을 보는데 얼핏 큰 아들 얼굴이 스치는 듯했다. 확인하는 전화를 하려다가 아비 된 자의 비겁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만두었다.
공무원의 갑주를 핑계 삼아 이 글을 검열하며 쓰는 내 모습이 초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