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생활지도로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면 좋겠습니다.
호들갑이 지나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을 크게 확대시키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런 재능을 발현시킬때마다 선생님이 자기에게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못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비롯한 학급의 아이들은 그 아이에게 타고난 재능을 발현시킬 빌미를 제공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내리막길을 걸어가다가 뒤에 오는 친구에 의해서 미끄러졌습니다. 외관상으로 찰과상도 일어나지 않는 단순하게 넘어진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보건실을 다녀온 이후로 거의 다리를 끌다시피 다니는 것이었고, 계속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서 이 해프닝에 관련된 아이들을 따로 모아서 경위를 더 조사해 보기로 했습니다. 요지는 내리막길을 내려오는데 비교적 뒤에 있는 아이의 신발 앞과 이 아이의 앞쪽에 걸어가든 아이의 신발 뒷쪽이 가볍게 엉키면서 도미노처럼 앞으로 쏠려 넘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넘어진 아이는 바로 일어나서 걸었고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넘어지게 만든 아이들에게 사과를 했는지 물어보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넘어지게 만든 것은 잘못이고 경미하지만 피해를 입혔으니 사과를 안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진정성있게 사과를 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넘어진 아이에게는 선생님의 판단이지만 현재까지의 상태로-양반다리로 앉을 수 있고, 심지어 뛰기까지 하면서 친구들이 볼때나 선생님이 볼 때만 다리를 끌고 다님-봐서는 별 문제가 없을 듯하니 다른 사람들 불편하게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원만하게 해결되는 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건선생님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아침부터 와서 계속 많이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는데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 될 것 같으며, 저에게도 이 일과 관련된 아이들의 자필 진술서를 받아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른 선생님도 그렇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선생님의 머리위에서 놀고 있는 한 아이'때문에 본의 아니게 경미하지도 않은 피해를 준 아이들을 무슨 범죄자 취급하듯 한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걸렸습니다. 학생에 대한 지도가 이렇게 변해간다면 체육시간에 게임이나 구기종목을 하다가 부딪히는 일들, 복도에서 부딪히는 일들 등을 비롯한 아주 사소한 것들에도 잘잘못을 따져야 되는 것인지 대한 회의감 마져 들었습니다.
애초의 나의 생각은 아이가 집에 가서 자기 중심적으로 부모님께 이야기를 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까, 오후에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로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이해를 구하려고 했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주변 선생님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보건선생님은 아이들 데리고 병원에 다녀오기로 하고, 저는 이 해프닝에 관련된 아이들을 모아서 현재 선생님이 처한 입장과 만약에 피해를 입은 부모가 항의를 하거나 자초지종을 물어온다면 사실그대로를 알려주어야 하기에 너희들의 자필 진술서가 필요하다고 설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오후에 피해를 입은 아이의 부모와 전화를 하면 쉽게 이해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선생님의 경험상 너희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소리도 우렁찼습니다.
다행히 병원에 다녀 온 결과 인대가 조금 늘어나 3일만 반깁스로 있으면 괜찮아진다고 하더랍니다. 웃음이 나왔습니다. 인대가 늘었났는데 3일만 지나면 괜찮아진다니, 아마 아 아이의 인대는 자가 치료가 아주 뛰어난가 봅니다. 부모님과 통화하여 이해를 구했더니 아무 탈없이 잘 지나갔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행복한 민주시민으로 성장시켜 주는 것이 의무입니다. 그 속에 생활지도가 있습니다. 아이들간에 생기는 여러가지 불협화음과 충돌을 원만히 해결해 가는 과정속에서 서로 배려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런데 이 경험들이 배려와 용서보다 범죄를 저지른 것처럼 처벌을 우선시한다면 행복한 민주시민보다 살벌한 개인주의자로 성장시킬 것입니다.
학교폭력 때문에 아이들의 생활지도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장과정 속에서 오는 아주 경미한 해프닝도 심각한 사건(?)으로 다루어야 하는 현실이 무섭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다가 멈출 것인지? 아니면 강도를 더해 가면 계속 진화할 것인지? 오리무중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학교를 더 어렵게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한 학교폭력이 심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폭력 건수가 문제가 아니라, 폭력의 강도가 상식을 초월하고 반인륜적으로 변해가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런 학교폭력의 경우는 단호하게 대처하고 사후 개선 프로그램을 통해서 재발이 안되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학교생활에서는 오는 사소한 성장통까지도 학교 폭력의 시각으로 대처한다면 사건(?)처리는 깔끔할 지 몰라도 그 과정속에서 받는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비뚤어진 교훈은 우리사회에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날 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선생님들을 탓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학교생활에서 오는 사소한 해프닝, 성장발달 단계오는 성장통까지도 학부모들은 학교폭력으로 간주합니다. 특히, 피해를 입은 학생의 부모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생활지도의 패러다임이 학생지도보다는 원만한 사후처리로 옮겨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히려 교육적인 측면에서 지도를 하려면 사건을 은폐하고 특정한 학생을 감싸기 위한 것이라고 학교를 때립니다. 이 속에서 선생님은 상처를 입고 지도보다는 매뉴얼에 의한 처벌에 무게를 두게 됩니다.
그래서 제안합니다. 매뉴얼대로 처리하더라도 선생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자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이런 방법을-진술서 작성 등-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돕기 위한 방법이지 괴롭히기 방법은 아니며, 차후에 이것으로 문제삼을 일이 없을 것이며, 선생님이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은 선생님이 책임을 지겠다는 믿음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런 일들이 생기지 않아야 하며, 누군가 확인하려 할 때는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할 것을 지도하는 것입니다. 비 온 뒤애 땅이 더 굳듯이 이런 일을 한번 겪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회상해 보면 존경스럽고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공부를 잘 가르친 선생님보다 우리의 입장에서 이해해 주려고 노력한 선생님, 편애가 없는 선생님, 우리를 믿어 주던 선생님이었습니다.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는 방법은 학교 생활의 불협화음에 매뉴얼대로 처리하더라도 그 과정속에서 아이들의 신뢰를 얻는 것입니다. 어떨 경우에는 과감하게 아이들편에 서는 것도 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혹자는 공무원이 철밥통이라고 합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아이들의 지도 과정에서 본의 아닌 선생님의 사소한 실수때문에 퇴직당하지 않습니다. 철방통의 장점을 발휘하여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선생님을 응원하는 선생님도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