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주 기행'3
다행히 비는 안 오는데, 앱에는 오후 늦게 비온다고 되어 있어서 오늘 등반하는 데는 지장이 없겠어.
그래도 모르니 우산하고 잘 챙겨가자.
가는 길에 편의점 들러서 김밥하고 물, 간식 충분히 사서 가자.
날씨가 심상찮은데…….
어, 비 떨어진다. 아무리 제주도라고는 하지만 이 짧은 거리에 날씨가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나.
어쩌나?
일단 성판악까지 가봐요.
등반 통제하지 않는데, 예약자 확인하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이 날씨에 백록담 볼 수 있을까?
우산만 있고 우의가 없어서 우산 들고 오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바람까지 불고.
통제하지 않는 걸로 봐서는 이 정도 비에는 등반이 괜찮다는 것이니까 도전해 봅시다. 안 되면 내려오지 뭐.
관리직원에게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백록담 올라가는 통제하는지 물어보니까 지금까지 괜찮다는데.
그럼, 힘들어도 고!
모노레일 올라오는 소리가 자꾸 거슬리는데.
하필 우리와 출발을 같이하여서, 나도 아까부터 저 소리에 신경질이 났어.
우리 페이스메이커라 생각하면 편한데, 그게 쉽지 않네.
나는 이번에 세 번째 등반인데, 당신은?
예전에 한 번 시도했다가 돌만 밟고 오르려니 짜증이 나서 중간에서 내려갔어. 이제는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꼭 한라산을 오르고 싶었어.
그때와 비교하면 등산로에 코코넛매트를 깔아놓아 상당히 편한데.
나무도 많이 울창해져서 좋아. 비만 안 오면…….
우산 잘 잡고 발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요. 등산스틱 접어서 배낭에 넣을래?
하나만 넣고 하나는 짚으니 편해.
등산로 따라 졸졸 흐르는 물이 제법 운치 있다. 조만간에 비도 그칠 것 같고.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좋아
아이고야! 갑자기 웬 비가 쏟아져.
나무 이파리에 붙어 있던 빗물이 갑자기 분 바람에 떨어지는 것 같은데, 하늘은 많이 파래졌어.
조금만 가면 속밭 대피소니 힘냅시다.
화장실부터 다녀와요. 이제 우산은 필요 없겠다.
간단하게 먹을까?
아니, 나는 삼각김밥하고 빵하고 든든히 먹을래.
신발은 젖지 않았어? 옷은?
괜찮아, 당신은?
모노레일 이제 당도했네.
우리는 출발합시다.
지금부턴 비가 그쳐서 좀 편하려나.
사라오름에 갔다가 갈래?
시간이 애매해서 내려올 때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려올 때 오를 힘이 있으면 올라가 봅시다.
돌도 많고 계단도 많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모노레일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좀 서운한데.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었는데, 중년 등반객과 젊은 등반객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았어.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네, 레깅스는 젊은 등반객, 바지는 중년 등반객이라고 말하고 싶었지?
빙고!
색깔도 검정 위주는 젊은 등반객, 알록달록은 중년 등반객. 우리는 비교적 단색인데도 오늘은 알록달록이야.
우리도 레깅스 사 입을까?
노! 나는 절대 노! 당신이나 사 입어보소.
스피커 소리가 들리는 것 보니 진달래밭 대피소에 다 온 것 같은데.
정상이 구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데, 백록담 못 보겠네.
걱정부터 하지 말고, 어디 자리 펴서 다리부터 좀 폅시다.
비 덕분에, 중간에 쉴 곳이 마땅찮아서 시간을 좀 아꼈다.
나는 비 덕분에 붐비지 않아서 좋다.
쉬지 않아서 안약 넣는 걸 빠뜨렸네, 안약 좀 줘요.
어떻게 해!
놀래라! 뭔 일인데?
안약을 데크 바닥 틈에 빠뜨렸어.
하아……, 하나 더 가져왔잖아. 그거라도 아껴야지 뭐.
하나밖에 없는데?
뭔 소리야 아침에 넣고 남은 것과 새것하고 두 개 챙겼잖아.
아 맞다! 그런데 빠뜨린 게 새것이야.
……
별수 없지, 그거라도 아껴야지.
……
짐 챙길 테니, 화장실 다녀와요. 천천히 올라갑시다.
이제부터 진짜 돌들의 잔치네.
발 미끄러지지 않도록 더 신경 써요.
여보 정상 한번 봐요. 구름이 가득한데, 올라가도 백록담 못 보는 것 아니야?
음, 미리 말해서 재수 없을지 모르겠는데, 내가 큰 복은 없어도 소소한 행운은 있어, 당신도 가끔 말했잖아? 손님 없는 식당에 당신이 가면 손님이 막 들어온다고. 오늘도 나 한번 믿어. 오빠 한번 믿어봐.
등산스틱 가져오길 정말 잘했다. 오늘 완전히 본전 뽑는다.
저기 텔레비전에서 본 고사한 구상나무들 아니야?
후우! 끔찍하다. 뒤엉켜 누워 있는 인간들이 겹쳐 보여.
기후위기 때문이라고 하고, 기후에 맞게 적응하는 상태라고도 하는데, 세월이 흐른 뒤에 인간이 지구에서 살 수 없을 때 확실히 알겠지.
기후위기에 대처하는 게 지구를 위하는 일이라 말하는 인간들 정말 싫어. 지구는 태양이 사라질 때까지 존재할 거야. 문제는 인간이 살 수 있느냐가 문제야.
당신 올라오면서 나무 표식 봤지, 거기에 안내한 개화 시기보다 올해는 한 달이 빠르잖아. 몇 년 전만 해도 내가 지구에 살 동안에는 기후위기와 무관할 것이라고 단언했거든, 이제는 나를 위해 기후위기를 조금이라도 늦추는 생활을 진지하게 실천해야만 하겠더라고.
백록담에 물이 가득 찼나 봐, 아까부터 등산로 옆으로 물이 해맑게 흘러내리고 있었어. 백록담을 못 보더라도 물소리만으로도 힐링이다. 우리가 언제 백록담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듣겠어. 기분 좋다!
백록담 표지석에 사진 찍게 줄 서자.
아니야 백록담부터 보고 사진은 나중에 찍어.
어어, 여보! 보여! 백록담이 보여! 상상한 그대로는 아닌데 물로 가득 찼어.
잠깐 빨리 거기 서봐, 사진 찍게.
이 구름 지나가면 더 잘 보일 것 같아, 잠시 기다리자.
야아! 이제 다 보여! 옳지 거기 바로 서 무조건 찍는다.
와아! 좋다! 쥑이네! 좋아!
이제 좀 쉽시다.
우리가 예약한 앞 시간대에 예약하려다 늦어서 시간이 빠듯하겠다며 걱정했잖아. 그런데 오히려 그게 잘한 일이 되었어, 요 앞 시간대에 오른 사람들은 구름이 가득 차서 백록담을 못 봤데. 역시 당신이 소소한 행운은 있어, 인정!
표지석에서 사진 같이 찍고 천천히 내려가자. 내려가면서 오르다가 빠뜨린 풍경 구경도 하고.
진달래밭 대피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사라오름까지 쭉 내려갑시다.
사라오름 올랐다가 내려오는 데 40분이 걸린다는데 올라가? 말아?
당신만 괜찮으면 보고 싶어, 물이 가득 차서 보기 좋다는 말을 들어서 더 가고 싶다.
오케이!
정말로 40분 다 걸리겠는데, 생각보다 가파르다.
지난번에 제주도 왔을 때 오른 오름이 뭐였지?
물항아리인가? 물 뭐였는데? 잠시만 검색해보자. 아! 맞아, 물영아리오름.
그때는 겨울이라 물이 없었잖아. 오늘은 또 다를 것 같아.
진짜 산정 호수다. 찍은 사진만 보면 오름이 아니라고 하겠다. 올라오길 진짜 잘했다. 비 오는 날 올라와서 여러 가지로 좋은 것 본다. 비 온다고 포기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제 당신이 개폼 잡아 보소. 마음껏 찍어 줄 테니.
어쭈! 제법 높이 뛰는데, 이제! 그만 해요. 눈 탈 난다. 아참! 안약 안 넣었잖아?
그렇네, 안약 줘요.
당신 내 덕에 소원 풀었네. 앞으로 서방님 잘 모시라 으잉.
하는 것 더 보고, 확실한 건 당신이 운은 좀 있어. 예전에 점쟁이가 노력에 비해 운 좋게 살 팔자라고 했다면서? 그 점쟁이 용하네.
노력에 비해 운 좋게는 무슨, 그래서 나하고 살면서 편했어? 난데없이 다치고 아픈 것만 해도…….
가다가 처음 나오는 식당 들러서 저녁 먹고 갑시다.
저기 있네, 저 집에 차 세워요.
갈치 크기를 모르니까 일단 일반 갈치조림 시키자.
일반 갈치조림의 갈치 크기가 우리에겐 왕갈친데, 왕갈치조림 안 시키기 잘했다. 이 좋은 안주에 술을 못 먹어 아쉽네.
태희 집까지 얼마 안 되니까 내가 운전할 테니 소주 한잔해요.
아니 됐어, 수제 맥주 있다니까 한 잔 시키면 나는 입만 좀 댈게.
맛있다. 갈치 맛집 안 가도 되겠다.
내일은 집에서 좀 쉬고 비 오면 실내 구경거리 찾아봅시다.
여기까지 와서 새벽같이 일어나 책보요.
피곤해서 일찍 잤더니 일찍 깨서 그렇지, 그나저나 태희는 어제 안 들어온 것 같은데, 제 처 오늘 오기 전에 한번 놀아보자 한 것 아니야. 조민에게 일러줘야겠는데.
그게 아니고 일요일이었지만 월말 업무가 밀려서 어제 낮에 출근하여 일 보고 저녁에 동료들과 술을 마셔서 회사 숙소에서 자고 오늘 저녁에 공항으로 가서 조민이 데리고 온다더라. 조민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더라.
우리는 10시나 되어서 나가 봅시다.
진짜 택시 기사들 마음에 안 드네. 아니, 우회전하기 전에 직진 방향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색이면 기다려야 하는 게 맞잖아? 진짜 줄기차게 빵빵거리네. 내려서 좀 따지고 싶다. 이봐라! 아! 진짜 새끼들!
그냥 가요.
아니, 빨간색으로 바뀌면 갈 거야. 제발 택시 기사가 좀 따지러 왔으면 좋겠다.
화려하다더니 외관은 공장인데.
글쎄, 잘못 온 건 아닌데, 간판이 맞는데, 주차장에 차 세우고 가봅시다.
이런 곳에 아이들 데려오는 것 나는 절대 반대다.
사진 먼저 찍겠다고 뛰어다니는 게 거슬렸어?
그것도 그렇고, 가짜 자연이잖아, 빛으로 아무리 그럴싸하게 만들었어도 가짜잖아? 제주도까지 왔으면 제주도 자연 속으로 가야지 그게 아이 건강과 감수성에도 좋지. 우리야 이것저것 비교하고 구분할 수 있어서 신기해서 온다고 치더라도, 아이들은 아니잖아. 그저 신기한 것 보여주고 사진 찍기에 바빠서는, 아이를 위하는 게 아니라 잘못하는 거야.
한라수목원에 가서 걷지는 말고 좀 쉬었다 갑시다.
갈치조림 먹으려다 먹지 못한 집에 한 번 더 가보자.
어제 먹었는데 안 질려?
내가 언제 갈치 질려하더나? 다른 비린내는 싫은데 희한하게 갈치 비린내는 안나.
차들이 많은데 갈치는 줄 서서 먹으려고?
일단 내려서 상황을 보고.
앉으라고 해서 앉았는데 어째 새치기하는 기분인데.
종업원이 여기 앉으라고 해서 앉은 건데, 뭔 새치기야.
새치기가 맞나봐. 화장실에 갔다 오는데 저기 저 남자가 안내받아서 자리에 앉았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하니까 이름을 장부에 확인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며 알았다고만 하더라니까.
당신 화장실 간 사이에 나에게도 저 남자가 와서 똑같이 묻길래 그렇다고 했지. 주문까지 받아 갔다고 하니까 고개만 갸우뚱하길래, 일어날 때 일어나더라도 사실대로 말해야겠다 싶어서, 자초지종을 말하려고 하니까 또 대뜸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다는 거야. 찜찜해서 음식 먹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시네. 종업원이 실수했으면 우리가 일어날 수 있는데, sns가 겁이 나서 그러나.
갈치가 맛있긴 맛있네.
크기도 왕갈치다. 다른 구이 안 시키길 정말 잘했다. 양념도 짭조름한 게 밥 비비니 딱 좋은데. 어찌 되었든 새치기가 운이었네.
당신은 이번에 제주도 와서 좋아하는 갈치 실컷 먹고 소원 풀었네.
당신은 백록담 봐서 소원 풀었고.
태희야 조민아 저녁은 뭐 먹을래?
이모, 이모부가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지 좋아요.
그러지 말고 너희들이 평소에 안 먹어본 것 사줄게.
우리가 대접해야죠.
마! 어른이 사는 게 맞다. 너희들 덕분에 돈 아끼며 여행 편하게 하는데.
아이들은 출근했나?
일찍 나갔어, 당신 어제 작정하고 그동안 안 마신 술 다 마시던데.
안주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어찌 술이 술술 넘어가지 않으리오.
천천히 나가서 아이들이 소개해준 보말칼국수 먹고, 동문재래시장에서 선물 좀 사서, 이호테우해수욕장에서 시간 보내다가 비행기 탑시다.
비 오는 바다 멍하니 바라보는 게 몇 년 만이요?
그런 기억이 없어.
당신 책 챙겨 올 때 은근히 걱정했는데, 어찌 책 안 펴고 멍하니 졸다가 깨다가 했소.
그게, 그 책 다 읽었어. 읽을 게 없어서 처음엔 심심했는데 조금 있으니까 편안하더니 꿈이 바다고 바다가 꿈이 되고.
철학자 나셨네.
그리고 이번에 한라산 오르면서 몸에서 힘 빠지는 쾌감을 느꼈어. 옛날에는 온몸에 힘주어 용쓰며 올랐는데, 이번에는 응어리가 스르르 흘러내리는 간질간질한 쾌감이 일었어.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 덜 피곤해.
도사 나셨네.
정말 당신은 제주도와 남다른 인연이 있는 것 같긴 해. 육지에는 비가 와서 긴 연휴 다 버렸다고 하는데, 우리는 제주도 와서 볼 건 다 봤잖아. 이제 떠나려니 본격적으로 비가 시작되고.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야.
그래, 안녕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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