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간섭

나는 배움의 공동체, 마을 공동체, 교사 학습 공동체를 이렇게 이해한다.

멋지다! 김샘! 2019. 8. 23. 14:23

교감이 되면서 굳게 결심한 것이 있었다.

교육학 서적을 읽지 않는다. 교육학 서적이라 함은 교육과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관련된 책을 의미한다.
이유도 있다.
교사를 할 때 교사를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교감이나 교장이 교육학 책을 읽고 학교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적용을 강요하는 경우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교사를 제대로 해 본 교감이나 교장이라면 교육학 책의 내용을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필요성, 타당성, 재구성 등과 같은 내부 토론과 토의가 필수임을 안다. 토론과 토의를 생략하고 무조건 시행하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학생들의 피해로 가닿는다. 교사는 하는 척만 하고 실적만을 쌓아두고 제대로 했다며 관리자를 속이는 것뿐이다. 그런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학생들은 이용만 당한다.

여름방학의 끝자락에 교감 일기로 약속한 배움의 공동체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우리 학교가 행복학교 2기를 운영하면서 올해(2019년) 배움의 공동체를 교사들의 협의에 의해 채택했기 때문에 지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꼼꼼하게 수용과 비판의 일관성을 유지하며 읽었다. 이어서 배움의 공동체를 비판하거나 뛰어넘자고 주장하는 책을 읽으며 배움의 공동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의, 배경, 특징, 포스트모더니즘의 교육적 적용 이론으로서 구성주의의 개념, 구성주의 교육의 교수-학습 원리도 생략한다. 다만 배움의 공동체는 사회적 구성주의를 대표하는 비고스키의 사회발달이론에 많이 치우쳐 있고, 교수-학습 원리도 구성주의를 따른다.
어떤 이는 질 들뢰즈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나의 지식이 협소하고 질 들뢰즈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못하여 현재(2019년)의 교육현장인 학교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분석하여 배움의 공동체를 바라보고자 한다.

1. 배움의 공동체는 현재의 학교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국가 수준 교육과정은 이미 구성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래서 교수-학습 원리에 구성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국가, 교육청, 교육지원청, 교사 집단에서 어떤 교수-학습 원리를 주장할 때 진지하게 수용했고 적용했다. 교육현장과 맞지 않는 경우에는 변형했고 변형이 불가능한 경우는 저항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구성주의에 입각한 것들이었는데, 이미 모더니즘식 교육을 비판하며 많은 교사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들을 구성주의 의미를 담은 외국어나 외래어 심지어 국적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문자로 둔갑시켜 현혹했다.
배움의 공동체와 교사 학습공동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보다 훨씬 이전의 교육현장, 모더니즘식 교수-학습 원리가 적용될 때로 회귀하여 학교를 진단하고 있다. 즉 현재의 학교가 절대 진리를 전승하기 위해 주입식, 강의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5년 전 열린 교육이 도입될 때의 주장과 똑같다.
교육과정의 변천과정을 아무런 사유 없이 수용만 했어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살고 있으면서 아니 포스트모더니즘이 의미 없어진 지금에서 모더니즘적 사고로 현재의 학교를 분석한 것은 교육과정의 변천대로 교육과정을 수용하지 못했거나 배움의 공동체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현재의 학교를 지옥이라 정의한 것에 불과하다.
2. 구성주의로 구성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배움의 공동체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와 구성주의 학자들의 철학과 이론을 차용하여 큰 덩어리의 교수-학습 원리를 내세우고 있다. 단 하나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겠다 평등으로 최상의 교육 질을 경쟁이 아닌 협동으로 제공하겠다고 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다. 배움의 공동체가 새롭게 주장하는 철학이 아니다. 그리고 철학이기 때문에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적용하는 방법은 달라진다고 했다. 이것은 구성주의 교수-학습 원리와 일치한다. 하지만 이미 배움의 공동체는 교수-학습 원리, 수업협의회 형식을 정형화시켜 현재의 교육 모순을 타계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구성주의가 경계하는 획일화와 유일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성주의로 구성주의를 비판하다가 모더니즘으로 회귀하였다.
3. 철학을 담는 단어가 어설프다.
공공성, 민주성, 탁월성은 주장하는 사람, 사회적 배경, 목적에 따라 달라지는 용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배움의 공동체는 교수-학습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 너무 협소하게 접근했다. 최상의 방법으로 최고를 추구한다며 탁월성이라고 했는데 모더니즘 사고로 구성주의를 주장하는 모순이다. 탁월성보다 다른 구성주의 교수-학습 원리와의 차이를 강조하는 단어를 선택했어야 했다.
홈, 스텝, 점프는 육상의 세단뛰기에 사용되는 단어다. 주장하는 내용과 외형적으로 비슷한 면이 있다 하더라도 신중했어야 했다. 세단뛰기에서 홈, 스텝, 점프의 방법은 배움의 공동체에서 주장하는 의미와 엄연히 다르다. 특정 분야의 방법적이고 기술적인 용어를 의미가 다른 교육 용어로 사용하지 말고 주장하는 의미에 맞는 다른 교육 용어를 찾아야 했다.

4. 수용하고 비판한다.

교사의 배움 사토 마나부 교수와 함께한 배움의 공동체 5년의 기록, 배움의 공동체,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다 학교를 바꾸다, 마을에 배움의 길이 있다, 교사 학습공동체의 순서로 읽으면서 각 책에서 주장하는 문장의 의미를 현재의 교실 상황과 맥락적으로 연결시켜 수용하거나 비판한다.


<교사의 배움 사토 마나부 교수와 함께한 배움의 공동체 5년의 기록, 배움의 공동체(손우정)>
-교사의 믿음에 반응하는 학생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학생들의 반응을 이렇다고 일반화하면  된다.  역시 모더니즘적 사고이다. 교사는 학생을 언제나 꾸준히 믿어야 하나 신뢰를 구축은 구체적인 상황에 놓인 교사의 몫이다.
-교실 개방과 동시에 연대와 지지를 겸손하게 부탁해야 한다.
-배움의 공동체가 평등한 네트워크를 강조하지만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역량이 높은 사람은 교사의 수업을 비판할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배워라는 논리는 수업에 대한 높은 역량은 배움의 공동체에만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주장하는 민주성과 탁월성과도 배치된다. 어느 누구의 발언이라도 존중되어야 하고 배움의 공동체가 최상의 교수-학습 원리는 아니다.
-무조건 경쟁보다 협동을 강조한다. 경쟁과 협동 모두는 최상의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때와 상황, 내용에 맞게 경쟁과 협동을 적절히 사용해야 된다. 경쟁의 결과를 패자로 인식되지 않게 최선을 다한 과정을 존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업개선과 교육혁명은 구분해야 한다. 수업의 개선만으로 교육이 바뀌는 것은 맞지만 교육이  바뀌지 않고 제도와 구조 개선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논리는 교사를 교실에만 묶어두는 오류를 범한다. 교육을 바꾸기 위한 교사의 현실 참여를 강조해야 한다. 교실 수업 개선과 더불어 법과 제도를 고쳐서 우리 사회의 그릇된 교육 구조를 바꾸려는 현실 참여도 중요하다. 사토 마나부 교수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일본은 시민의 정치 참여를 주장하는 나라가 아니고 국가의 정책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나라다. 시민보다 신민의 삶을 가치로워한다. 우리는 국가의 교육정책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으로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를 따지는 시민으로서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학교 안에만 가두면  된다.
-우리에게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철학이 있었다. 배움의 공동체에서만 학생과 교사가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교육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동안 우리가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배움의 공동체도 실천을 강조하는 과연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조금을 많이로 시늉을 모범으로 포장하고 있지 않은지 냉철한 성찰이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이 되면  된다.
-배움의 공동체만 구성주의 교수-학습 원리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미 많은 교사들이 배움의 공동체보다  뛰어나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배움의 공동체를 강조하기 위해서 현실의 학교와 교사를 근거 없이 폄훼하는 것은 동료로서의 교사가 아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한 선의의 경쟁자이자 동반자다. 계몽이 아닌 연대의 대상이다.
-질 높은 배움과 평등을 추구로 진정한 인간의 성장하기 때문에  과정에서 학력은 자동적으로 향상된다고 한다. 인간으로서 성장하기 위해 독서를 하는데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와 상통한다.
-학습량을 줄이고 높은 수준을 유지하여 교과서 진도 문제를 해결하라고 하는데 속진과 심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다. 심화로 속진이   있고 속진으로 심화될  있다. 교과서의 쪽수로 심화와 속진을 구분하면  된다. 교과서 뒤쪽 내용을 언급한다고 무조건 속진으로 판단하면  된다. 내용, 상황에 따라 깊이, 수준, 단계를 구분, 융합, 통합해야 한다.
-교육 내용과 관계없는 말을 하지 말고 배움과 관련된 내용만으로 교사의 말을 줄이라고 한다. 동의한다 하지만 일반 수업에서도 학습 동기를 짧으면서 강하게 유발하여 본시 학습을 바로 시작하라고 한다. 그리고 어느 수업이든지 수업 내용과 관계없는 상투적인 말을 삼가고 학생들의 입장에서 학습 내용을 선정하고 재구성하라고 강조한다.
-같은 내용이 반복되고 있다.
-교사의 남다른 노력, 뛰어난 자질, 개방적 태도가 관건이다.
-현재의 혁신학교는 배움의 공동체와 개인의 경험에 의한 개똥철학이 섞여 있다. 깔끔하게 배움의 공동체를 제대로 실천하려는 노력이  나을  같다.
-배움이 부족한 학생에게 무조건 어려운 문제를 던지면 관심을 가지고 배움이 일어난다고 강조한다. 배움이 관심으로 시작은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관심을 가졌으면 해결하여 성취하는 것이 배움이다. 삶의 문제를 배움으로 가져와서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어려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과제는 너무 쉬워도 어려워도  되는 애매한 수준이어야 한다. 애매하다고 표현한 것은 학생마다 관심과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제가 삶과 관련되어 있어서 관심을 가졌더라도 해결할  있는 학력이 없으면 금방 포기한다. 배움의 공동체에서는 친구에게 먼저 물어서 해결하라고 하는데 친구에게 물어서 해결할 정도의 학생은 양호하다. 정해진 시간에 학력이 많이 부족한 학생을 도와주면서 자신의 배움을 유지시키는 학생은 드물다. 이런 반론에 배움의 공동체에서는 성취의 정도가 아니라 관심을 가졌으니 배움이 일어났다고 애써 만족한다. 주장하는 탁월성과 배치도는 모순이다. 기초학력이 부족한 학생은 수업을 떠나 교사의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수업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없다.
-관심을 가졌으면 해결하기 위한 사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유만으로 해결이  될 때 사유의 결과를 공유하여 협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다. 개인의 사유를 생략하고 무조건 묻고 협동으로 해결하라는 주장은 동의하기 힘들다. 그리고 4인 모둠 구성은 배움의 공동체 주장이 아닌 무임승차를 예방하기 위해 과거부터 강조했다. 어느 학자의 주장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좋은 것만을  모아놓아서 반복되는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산만하고 주장의 모순이 일어난다. 배움의 공동체가 완전무결함을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토 마나부 교수가 한국의 배움 공동체가 방법론으로 흐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완전함을 증명하려고 이것저것을 차용하다 보니 내부 모순과 실천의 질이 떨어지고 비난의 빌미를 제공한다.
-배움의 공동체 실천을 위해서 학교 조직을 단순화해야 한다고 했다. 옳다 더불어 법령, 지침, 규정, 매뉴얼에 의해 당연히 해야 되는 것은 협의의 대상이 아니다. 회의와 협의가 필요한 내용과 없는 내용을 구분하여 최소화해야 한다. 구분이 힘들 경우 교감과 교장과 협의하면 금방 해결된다.  필요한 시사, 계기, 행사성교육 활동은 교과 교육과정에 포함시켜 운영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배움을 가로막는 현실의 벽을 자각하여 허무는 작업에 앞장서야 한다. 관행적인 기존의 벽과 틀을 깬다고 문제 생기지 않는다. 연대하여 일단 깨 보시라. 실천 가능한 것을 단순화하여 지속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평가를 하지 않는 것보다 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움이 중요하다. 성취로 만족감을 얻고 부족하면 성장의 기회로 삼으면 된다. 인간의 성장에서 실패라는 단어는 지워야 한다. 배움의 정도는 있다. 배움의 정도는 각자의 몫이다. 수용하여 인정하여   배움으로 이끌면 된다. 그런 방법 중의 하나가 평가다.

< 배움의 공동체를 만들다 학교를 바꾸다(포남초 교사들)>
-교육을 바꾸겠다는 헌신, 가르치는 보람을 행복으로 삼는 교사의 삶이 대단하다
-대충 하지 않는다. 위기의 현실을 극복하기 체계적이며 실천 가능한 대안을 찾아 실천하는 교사들이 정말 존경스럽다.  소원이 이런 분들과 함께 학교 생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인 피로감으로 교육자로서의 행복을 얻고 싶다.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실천했을까라는 의문도 있다.
-교감으로서 나는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것보다 학생들의 배움을 함께하고 싶다. 물론 교육 행정가로서 교감의 역할을 벗어나겠다는 말은 아니다. 교원이 하지 말아야 되는 업무를 교감이 대신 맡아야 된다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교감의 고유 역할과 진정으로 교사들의 수업을 돕는 역할을 애야 된다. 교사 중에 교사 같지 않는 사람 있듯이 교감이나 교장 중에 교감, 교장 같지 않은 사람 있다. 그런 사람으로 전체 교사를 판단하지 않듯이 그런 사람으로 전체 교감, 교장이 그러하니 교사들의 행정보조 일만 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육자로서 축척된 지혜를 썩히는 것이다. 상생하는 동반자적인 관계로 발전시키자.
-프로젝트와 체험학습, 일반적인 배움 활동의 주제에 맞는 교사의 전문성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축구를 체험하는 것은 축구 경기를 하는 것이다. 패스와 드리블, 슈팅 연습만 하는 것은 축구 체험의 올바른 개념이 아니다. 흉내만 내고 배움을 했다고 주장하면  된다.
-학년별 프로젝트 학습은 내가 추구하는 삶과 앎이 하나 되는 배움과는 거리가 있다. 나는 아이들의 실제 삶을 교육과정에 통합하거나 융합하여 지속 가능한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4학년의 앎과 삶을 연결 짓는 사회 수업이 인상적이었다.
-5학년 교사가 기존 지도안의  의미 없는 수업 모형, 화려한 동기 유발과 학습 문제 제시를 공감할  없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는 인정하지만 모든 교사의 지도안이 그렇지 않다. 특히 수업 모형은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액세서리처럼 여기는 교사의 태도가 문제다. 제대로 알고 비판해야 가치가 있다. 그리고 기존 수업 지도안으로도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있다. 배움의 공동체가 철학이라고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기존의 수업공개를 보여주기라고 비판하면서 배움의 공동체 수업과 차별화한다. 하지만 배움의 공동체 수업 공개도 공개수업이다. 어느 공개수업이나 실제 수업과는 차이가 있다.
-학년초의 진단활동이  인상적이다. 벤치마킹할 필요성을 느낀다.
-학생들의 성장을 상세히 기록하여 가정에 통지하는 노력이 대단하다.
-학급에서 학부모와 소통을 시도하는 다양한 방법은 알지만 실천이  되지 않는다. 아이의 교육을 학부모와 꾸준히 연결하면 학교 참여도가 높아진다. 행사로 학부모와 소통을 마무리 시도해봤자 일회성에 머문다. 교실로 학부모를 끌어당기지 못한다.
-학생자치회가  좋다. 하지만 학생들이 결정하여 실행할  교사는 예상되는 어려움을 사전에 파악하여 제대로 실천될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예를 들면 100명 이어달리기를 했을  발생하는 문제는 충분히 예견할  있었다.
-한글날 교육활동 참가 학생에게 초콜릿 과자 인센티브를 없애자는 학생의 주장은 교사들의 노력이 내재적 동기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인센티브는 외발적 동기다. 인센티브를 얻기 위해서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사는 원래의 활동에서 의미를 찾도록 기능적이고 의도적인 방법으로 최대한 빨리 내재적 동기가 유발되도록 했을  인센티브가 의미가 있다.
-방송부를 자치회로 전환한 것은 좋다. 방송시설이  되어 있는 학교는 DSLR 카메라와 인터넷을 연결하면 불필요한 학내 배선 작업을 하지 않아도 고화질의 학생 자치회 방송을 학교 공동체가 함께 즐길  있다. 동영상 편집도 간단하게   있는 앱도 많다.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실천한 것을 피드백하는 역할을 학교 방송이 담당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다.
-지역과 함께하는 교육활동이 제대로다. 체험보다 견학과 즐김에 무게를 두는 경우가 있는데 포남초는 제대로 지식을 몸으로 체험하고 앎으로 즐긴다. 물론 덤으로 얻는 교육 효과도 소중해서 무시할  없다.
-인재육성은 교육의 목적  하나다. 학교, 마을, 지역과 협력하여 어떤 분야에 뛰어난 인재를 기를  있다. 하지만 혁신학교, 배움의 공동체는 이런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을 부정하는 것에 가깝다. 배려와 협력의 인간미를 가지 사람으로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모든 교육이 추구하는 바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에게도  지역의 활동가에게도 평범하고 행복한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이 배려와 협력의 인간미다. 그런데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교육을 폄훼하여 그런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배려와 협력, 존중도 모르는 자기의 출세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상으로 고정시켜서 그런 인간이 되는 교육을 포기한다. 스스로 사다리를 걷어차면  된다. 지역, 우리나라, 시계를 바꾸는 인재를 굳이  기를 이유가 있는가? 오히려 혁신학교를 통해 그러한 인재들이 나올  혁신학교가 성공하는 것이 아닌가? 공교육이 계급의 이동이 되는 사다리가 되지 못하고 학력이 계급이 되는 사회에 직면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스스로 사다리를 걷어차서 계급의 이동을 막는 행위만큼 어리석은 짓이 어디 있는가? 내가 가르친 흔히 출세한 학생 중에 민주시민 의식, 인간미, 도덕성, 겸손과 배려를 갖춘 이들을 구체적으로 말할  있다. 모든 교육에서 기본으로 강조하는 덕목을 배움의 공동체만 추구한다고 자만하면  된다.


<마을에 배움의 길이 있다>
-배움의 공동체를 은근히 비판하고 있지만 역시 구성주의에 입각한 교수-학습 원리다.
-창발성을 강조한다.
-공동체의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하지 않고 전문가에게 무조건 의존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공동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할 경우 배움의 공동체를 이용할  있지만 배움의 공동체로 공동체 자체의 문제를 해결할  없다.
-배움의 공동체처럼 수업으로 삶을 이해하면 진정으로 배움을 이끌  없다. 공동체의 삶으로 성장과 발달을 이루어야 한다.
-일본은 종속적 근대화를 이룬 국가라서 교육이 근대화를 달성하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래서  수단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관리 감독하기 위해서 공개수업을 강조했다. 교육 선진국이라   있는 다른 나라는 공개수업이 없다. 우리나라도 일본의 영향으로 공개수업을 강조하고 있다. 수업 개선을 위해 공개수업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삶을 앎으로 바꾸기 위해서 연대하고 협력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공개수업에 대한 피로와 전문성을 강조한 학습공동체로 피로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통합, 융합, 통섭을 강조하면서  전문성을 내세워 배움을 파편화하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다.
-마을, 공동체를 통한 바른 방법을 안내하고 있지만 실천하려면 여간 힘들지 않겠다.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야겠다.

<교사 학습공동체>
-배움의 공동체와 맥을 같이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전체의 현재를 부정하면 주장을 하기 수월하다. 그러나 수월한 주장을 위해 현실을 부정하면 주장으로 그친다.
-교사의 선호도와 교사 효능감 불일치를 이해할  없다고 했는데 IMF를 겪은  직업 안정도 만을 생각해 교사가 되지 말아야  사람들이 교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정도의 현실 분석을 못한다면 앎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설프게 현재 교육의 모든 문제를 모더니즘에 입각하여 강의식, 일제식 교육이 문제였다고 주장하면  된다. 이런 주장은 교사용 지도서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어 보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은 본인을 탓해야 한다. 

-교사 학습공동체를 처음 시도하는 교사들에게는 유용한 책이 될 것 같다. 


주례사 비평을 할 수 있지만 태생이 비판적이라 그렇지 못했다. 독자마다 받아들이는 정도는 다를 것이지만 유용한 책들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배움의 공동체, 마을 공동체, 교사 학습공동체를 비판한 것은 제대로 적용하여 함께 나아가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활동가들은 겸손해야 한다. 사람들은 내용을 전달하는 사람의 언행에 의한 감정으로 내용을 파악하고 평가한다. 동료는 계몽의 대상이 아닌 동반자다. 평등한 연대를 위한 동료다. 잊지 말아야 한다.

#교사의배움(사토마나부)
#배움의공동체(손우정)
#공동체를만들다학교를 바꾸다(포남초교사들)
#마을에배움의길이있다(문재현)
#교사학습공동체(김혁동,윤상준,이동배,임재일,주주자저외2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