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특정 채널의 특정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을 보지 않은지가 제법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과 정당 지지율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정책이 마음에 덜 차서도 아니다.
정치인들의 정치 형태가 정말 역겹도록 싫다.
토의와 토론의 날카로움과 엄숙함은 사라지고 인신공격, 사실이 확인 안 된 소문에 의한 난도질, 여기에 열광하며 스스로 저능아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지지자들의 형태를 제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론 저런 추잡한 정치형태가 우리들에게 통한다는 것이 더없이 서럽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학력 수준이 높은 우리나라에서 저런 판단과 광기가 버젓이 자랑스럽게 언론에 언급되고 패널들은 비평을 한다. 패널들의 비평 수준도 그들과 나란하다.
어떤 이는 정치를 역겹도록 만들어 국민들의 관심으로부터 이탈되어 그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것이라며 이럴 때일수록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된다고 한다.
공감한다. 그래서 모든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내 의사를 표현하고 내가 뽑은 정치인이 제대로 하는지 지켜볼 것이다.
그런데 요 근래에 나의 주변에서 이루어진 우리 의식을 보면 정치인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정치인들을 뽑은 우리들을 탓하려는 마음이 앞선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우리 몸에 배어있는 비민주성을 떨쳐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내 주변의 소소한 것들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나라가 변화지 않을 것이고 소소한 변화의 주체가 내가 되지 못하면 우리 후손들도 결코 오늘의 역겨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평소 생각의 연장일 뿐이다.
정의를 인간 최고의 덕, 최소의 선이라 각각 주장한다.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최소의 선에 공감한다. 최소한 선이 통념이 된 사회만 되어도 제법 그럴싸한 부끄럽지 않은 나라라고 생각한다.
이런 최소 선의 관점으로 주변의 우리들을 비판한다.
지연, 혈연보다 학연의 생명이 더 길다.
돈을 제법 벌어서 고등학교 동창회 임원이 된 그렇게 친하지 않은 친구가 본인의 정의와 다른 엉뚱한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단지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어서.
도교육청에 중요한 협의를 위해 출장을 갔는데 자기의 출신 고등학교부터 이야기한다. 중요한 학생들의 교육을 위한 중요한 협의와 출신 고등학교가 어떤 연관이 있는가?
하도 정치권력들이 지연과 혈연에 의지하다 보니 줄기찬 비판이 있었다. 그래서 요즘은 지연과 혈연을 공개적으로 내세우지 못한다. 그런데 학연은 그 생명의 뿌리를 우리 의식의 밑바닥까지 깊숙이 박아 두었다. 몇 년의 가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진 틈 사이로 물을 찾아 뿌리를 박은 잡초를 본 일이 있는가 그 잡초를 뽑아 본 일이 있는가? 하얗고 가는 촉수의 끝은 끝내 뽑을 수 없는 그 잡초, 그 촉수에 가는 물기만 묻어도 금방 되살아 애지중지 키운 먹거리의 성장을 훼방 놓는 그 잡초, 오늘의 학연이 그렇다. 잘못된 학연에 대한 인식은 사회의 진보를 철저하게 방해하여 퇴행의 삶을 강요하는 신민의 삶으로 가둔다.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대학 입시 논란의 뿌리도 결국 학연의 병폐에 있다.
내 이익을 위해서 투표했다. 여기서 이익이란 정의를 위한 이익이 아닌 철저한 사익 추구다. 제도의 혜택을 내가 독식하기 위해 그 후보에게 투표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후보와 직접 관련이 없는 후보의 친인척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다음 선거에도 또 그럴 것이라고 한다. 그럼 지금의 누구들과 무엇이 다른가?
조직을 위해서는 조직원의 현실이 중요하지 않다.
내가 속한 조직을 대표해서 다른 조직을 대표하는 분을 만났다. 그 조직의 뿌리는 학교인데 학교와 조직원의 현실은 몰라라하고 오직 조직의 목적만을 강조한다. 조직원을 위해서 조직이 있는데 그 조직의 이기, 정확히 말하면 그 조직의 권력자의 이기를 위해서 조직원의 희생은 안중에 없다. 국민을 위한 국가가 국민은 안중에 없고 그들이 국가라는 오만방자함과 무엇이 다른가?
돕는 게 돕는 것이 아니다.
큰 아들이 근처 경찰서에서 의무경찰로 복무하고 있다. 두 통의 전화가 왔다. 경찰서에 아는 지인이 있어서 큰 아들을 잘 부탁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전화다. 단호하게 만류할 기회도 없이 그렇게 되었다. 내게 말만 그렇게 해놓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었기를 희망할 뿐이다. 출세를 위해 내 삶을 검증받을 일이 생기지 않을 테지만. 그나마 내가 알고 있어서 문제를 제기하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책임질 수 있겠지만 모르고 있다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그들에 의해 사실로 드러나면 내 삶은 내 인생은 어떻게 되겠는가?
돕는 게 돕는 것이 아니다. 진짜로 돕는 것은 각자의 삶을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것이다.
병원 예약은 왜 필요한가?
큰 병이 나면 서울의 유명한 병원에 가야 한다. 정상적으로 예약하여 기다리기엔 시간이 너무 걸린다. 아는 사람을 통하여 진료와 수술을 앞당긴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랑이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전부 유명한 병원에 아는 사람들이 다 있다. 정말 희한한 세상이다. 환자의 상태에 맞게 예약 시간을 앞당기고 늘리는 것은 병원의 권한이다. 병원 관계자들과의 친분에 의해 이 순서가 바뀐다면 다른 사람은 어떡하란 말인가? 타인의 정상적인 삶의 방식에 의한 생명을 불의로 방법으로 빼앗는 것이 정상적인 국가의 사회인가? 그런 현대적인 계급으로 봉건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하는 우리가 정상의 국가를 외칠 수 있는가?
국가 권력기관의 개혁과 더불어 우리의 직접적인 삶과 생명에 관련된 민간 부분들의 개혁도 시급하다.
민주주의를 거창하고 힘들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국민을 위해 현명한 결정을 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권력자 1인이든 다수이든 국민의 삶과 생명을 살리는 결정이 현명하다. 그리고 그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결정자의 결정만 책임지라 하고 결정의 과정에 관여된 불의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더 모순되는 것은 국민들의 삶과 생명을 살리는 결정이 싫어서 결정 과정의 불합리를 불의를 넘는 인간 말종의 올가미를 씌운다. 우리가 늘 저질렀던 그 관습적인 불의가 현명한 결정을 번복시키는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이제는 관습적, 관례적으로 행해지는 우리 주변의 부정의 '내'가 주체가 되어 개선시키자. 그렇지 않고 여전히 나만의 이익을 위해 권력 주위를 맴돌고 권력기관의 문을 기웃거리고 나만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정당한 권리와 생명을 위협하는 행위를 한다면 내 자녀들, 우리의 소중하고 선량한 이웃들은 언제든지 그들에 의한 죄악의 올가미에 목을 넘겨주어야 한다.
주변의 불의에 둔감하고 악이 악이 아닌 정도의 차이로 정의와 불의를 구분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나라에서 영원한 신민으로 남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