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감 일기(2018~)

2023년 4월 22일

멋지다! 김샘! 2023. 4. 22. 11:24

미지(MZ)에게

미지야, 요즘은 회의하지 마라하고 회의해도 너를 좀처럼 볼 수 없어서 편지를 쓴다. 아, 인사를 잊었네, 초등학교 교감이 편지글의 형식은 갖추어야 하는데 오래간만에 편지를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

그동안 잘 지냈어? 너와 마주 앉아 여러 번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봤자 꼰대라는 두 글자로 정리될 게 뻔해서 참았어. 참았다기보다 굳이 네 인생을 간섭하며 스트레스받기 싫었어. 어제 인터넷 신문을 읽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어. 너희 노조 중의 하나에서 지금도 우리나라는 장애인의 이동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는데, 전장연(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연대)의 서울 지하철 시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보도였어. 지금 우리나라가 장애인의 충분한 이동권을 보장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밝히지도 않고 토론 잘하는 네가 왜 그랬어. 설마 몸이 불편한 그분들이 미움받을 게 뻔한 시위를 장난삼아 하고 있다는 저의는 아니겠지. 아주 부끄러웠어.

너를 많이 잘못 가르쳤구나.
나와는 다르게, 너는 세상에 주눅들지 말고 당당하게 맞서라고, 하고 싶은 말 스스럼없이 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라고, 만들어진 길에서 허덕이지 말고 좀 방황하더라도 너의 길을 만들어 보라고, 그렇게 하다가 넘어져도 내가 일으킬 수 있으니 짧은 청춘 애어른으로 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내 친구들이 너희들의 미완성된 말과 행동을 신의 계시처럼 퍼뜨렸어. 나는 이러다가 말겠지, 설마 네가 그런 말에 현혹되겠어. 그런데 말이야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네 표가 필요한 정치권에서 그걸 이용하더니, 이제는 현재를 사는 너를 미래세대라며, 내가 현재의 너를 위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허물며 네 미래를 위한 거란 거야. 신자유주의의 부랑아인 자기계발자들은 내가 네 멋대로인 네 행실을 이해하여 네 멋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며 떠들고 다녀.

그게 너를 위한 것 같아.
여러 번 속았잖아. 돈이 돈 버는 신자유주의를 단단히 하려고 취업이 안 되는 것은 네 능력 부족이니 자기 계발하라며 책 출간하고 강의하며 인기 끌었잖아. 그런 책 읽고 그런 강의에 박장대소하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네 삶을 계발했더니 그 책과 강의대로 되었어. 네 삶만 피폐해지고 자기계발자들만 돈 벌어 가며 신자유주의를 공고히 했잖아.
피폐한 네 삶에 남은 마지막 피까지 뽑아내려고, 피곤한 네 삶을 회복해야 한다며 여행과 맛난 음식으로 힐링하라며 온 미디어가 나서서 꼬드겼잖아. 너는 sns에 떠다니는 박제된 음식과 풍광을 네 것처럼 하려고 밥 먹듯이 굶는 위장 장애의 일상을 살았잖아. 막상 그런 풍광에서 그런 음식을 시키곤 긴 위장 장애의 삶이 찰나의 순간이 돼버리는 게 안타까워 그날을 박제하며, 미디어가 가르친 맛과 아름다움이 마치 네 것인 것처럼, 너처럼 산다고 했잖아.
여기서 멈추지 않았잖아. 남은 것 없는 너에게 규제 완화라는 이름으로, 은행에서 집값만큼 돈 빌려줄 테니, 몇십 년 동안 갚도록 해줄 테니 더 오르기 전에 집 사라고 종용했잖아. 이마저도 안 되는 너에겐 코인, 주식으로 벼락부자 된 친구들을 소개하며 꼬드겼잖아.

또 속을래.
그들이 너를 위해 무엇을 했어. 그들 말에 잘 따랐더니 그들이 너에게 취업시켜 주고, 맛난 음식과 즐거운 여행시켜 주던, 지금 네 집 포근해.
불과 얼마 전에 고루한 시대가 있었어. 나이가 권력인 시대였어.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다간 패륜으로 찍혔어. 패륜으로 만든 사람들 지금 어디 있어. 아스팔트 위에서 본인들 말이 진리라며 태극기 흔들며 떼쓰고 있잖아. 세상 물정 모르는 고루한 그들의 말에 너는 공감할 수 있어.
그들이 불안한 현재의 삶을 겨우겨우 살아가는 너를 미래세대라며 부추기며 네 행실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경계 지었어. 나는 불안불안한 네 삶을 건지려고 네 희생으로 벌어들이는 그들의 무자비한 돈에 세금을 더 붙이자고 했어. 나는 그들이 경계 지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침투하여 정신 차리라고 타일렀어.
그들은 그런 나를 가짜뉴스로 너의 미래를 갉아먹는 악다구니 짓을 하는 악귀라 호도하며 내쫓으라고 조정했어. 너와 내가 힘을 합쳐 그들과 싸워야 하는데, 그들이 너와 내가 싸우는 판으로 만들었어.

너와 싸우면 안 되기에 물러나.
너와 이길 자신이 없어서 판세가 기울어서 물러나는 것 아니야. 세상을 잘못 내다본 내 잘못, 세상과 사람을 애매하게 비판하며 나이브하게 가르친 내 잘못도 커.
너는 부정하겠지만, 네가 우리야. 광활한 우주에서 툭 떨어진 별종이 아니잖아. 앞서 산 지구인들의 문명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너 이잖아. 앞서 산 지구인 중의 한 명인 나도 네 유전자에 스며있잖아. 그러니 너는 나야.
너도 아스팔트 위에서 태극기 흔드는 고루한 노인이 되지 않아야 해. 그들이 지금껏 너에게 어떻게 했는지, 내가 덜 가르친 비판으로 그들을 공부해 봐. 그런 비판으로 사람과 세상 공부해서 얼마 안 남은 너의 미래 네가 열어. 내가 하지 못한, 네 다음을 잇는 미래 지구인을 잘 다독여서 네가 만든 미래에서 이탈하지 않도록도 해봐.

미지야.
학교에서 미움받지 않는 선생 하라는 글을 쓰려다가 엉뚱한 길로 샜어. 나중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여서 엉뚱한 길로 빠진다고 눈치챘지만, 그냥 그 길로 여기에 왔어.
나는 세대 차이는 있지만 그 차이가 선과 악이라고 생각 안 해. 문명의 진보만큼 문명을 향유하는 방법의 차이라고 생각해. 그 방법에는 원시의 숲에서 나와 더불어 살아야만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사람의 마음이 스며있다고 믿어.
세대 차이를 악용하여 경계 지어 갈등으로 돈 벌고 권력을 쥐려는 그들에게 나는 세대 차이가 아닌 사람의 차이라며 그들을 무력화시켜. 선하고 악한 사람은 있어도 선하고 악한 세대는 없어.

미지야, 사실 이 말을 하려고 했어.
선생 똑바로 하지 않으면서 공무원 복지만 챙기고, 학생 학습 부진과 일탈을 학부모와 학생에게만 돌리며 학교를 놀이터 삼으면 네 세대가 그렇다는 핑계로 물러서지 않을 거야. 교감으로서 한 사람인 너에게 선생은 그러면 안 된다고 진솔하게 타이를 거야. 네가 나를 꼰대라며 삐죽거려도.
지금 네가 미워하는 그 선생을 네가 닮으면 안 되잖아.

미지야.
이만 쓸게.

또 편지할까?

2023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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