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공문이 있었다.
교장 선생님과 상의한 후 신청을 했다.
경남교육청과 제주교육청에서 주최하고 주관하는 4.3과 인권연수였다.
작년에 신청하려 했는데 긴장된 초임 교감 시절이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연수대상자에 익숙한 선배가 있어서 공항까지 같이 가자고 했더니 비행기 예매를 해놓았단다.
제주로 가는 시간은 맞췄는데 오는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각자 출발한 후 공항에서 선배를 만나서 제주도 호텔까지 함께 했다.
호텔에 가방을 던져두고 올 1월에 봐 둔 서문시장에서 제주 돼지고기도 맛있게 먹었다.
연수대상자 명단에 룸메이트에 대한 안내가 없어서 1인 1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1인 1실로 예상하여 잠옷을 가져오지 않았는데 아는 선배가 룸메이트여서 걱정을 덜었다.
다음날 아침에 버스에 오르려는데 선배가 지역교육지원청 후배 장학사를 소개해줬다.
장학사가 붙임성이 좋아서 금방 친해졌다.
연수 내내 지식과 지혜가 확장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이번 연수의 두 번째 보람이 이 후배 장학사를 만난 것이다.
연수를 시작했다.
어떤 이가 우리가 지금까지 4.3과 인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을 반성해야 된다고 했다.
4.3과 유사한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자고 했다.
말을 듣다가 입에서 불쑥 어떤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당신은 다른 일을 신경 쓴다고 우리 역사의 아픔 역사를 등한시 했다.
많은 이들은 오래전부터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장하고 있었다.
당신과 같이 다른 일로 바쁜 사람들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아닌 우리라는 표현을 하는가?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수 있고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생각은 없다.
적어도 자신이 다른 일에 관심을 둔다고 그동안 4.3과 같은 우리 역사의 아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부끄럽다해야 한다.
지위가 높아진다고 지식과 지혜가 저절로 높아지지 않는다.
높아진 지위만큼 높은 혜안이 지위를 빛나게 한다.
4.3에 대해서 사전 지식이 있었다.
그래도 먹먹했다.
이데올로기와 신념이 생명보다 중요하다는 말인가?
미군은 우리를 어떤 존재로 보았길래, 이승만은 제주 도민이 어떤 의미였길래.
민족의 염원인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남한만의 단독정부 단독 선거를 거부한 것이 죽임을 당할 일인가?
제주도민의 높은 통일 의식과 민족정신에 대한 열등감이 그렇게 당신을 괴물로 만들었나?
학살은 하르방, 할망, 아방, 어멍, 아덜, 똘을 구분하지 않았다.
제주 돌의 촘촘한 구멍처럼 그들의 만행이 제주도에 촘촘하다.
그들의 살육으로 제주도가 불탔다.
그들의 은폐로 동네 개가 미쳤다.
아니 그들이 미친 개였다.
아름다운 빛깔의 북촌 바다는 학살된 순박한 이들의 뼈에서 추출된 인(燐)들의 슬픈 향연인가?
살아남은 자들의 한숨 속의 습기들이 섯알오름 학살터 웅덩이의 물이 되었나?
누가 4.3을 불온한 소설로만 만나게 했을까?
왜 아직도 4.3을 이름 짓지 못하고 백비로 눕혀두고 있는가?
4.3과 인권은 아무 관계가 없다.
4.3은 인간에 의해 자행되지 않은 이성의 뇌가 퇴화된 인류의 만행이었다.
이들에게 인권의식이 없었다고 운운하는 것 자체가 이들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저들과 다르다.
우리의 인권으로 순박한 희생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
우리의 인권으로 엄격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의 인권으로 누워있는 백비에 제주 4.3 항쟁을 새겨서 우뚝 세워야 한다.
스러져가던 4.3을 소환한 직무연수가 좋았다.
두루뭉술하게 반복되는 연수 내용과 뙤약볕을 걷는 긴 길이 하품을 유발했지만 같은 생각을 나누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았다.
누군가 제주에 가자하면 4.3 유적지 순례를 제안할 것이다.
너는 또 다른 나라는 생각으로 4.3의 우울한 교훈을 잊지 않을 것이다.
4.3은 스러질 수 없다.
#교감일기
#나쁜교사불온한생각으로성장하다 / 김상백 저
#내수업을간섭하지마라 / 김상백 저
#착하게사는지혜 / 김상백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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