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에 전학 온 여학생에게 상습적으로 맞은 적이 있다. 지금 말하지 못하는 이기적이고 복잡한 이유로 우리 학교로 전학 온 소위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학생이었다. 하필 인근 교육지원청에서 우리 학교로 전학 온 이유도 이 학생과는 상관없는 어른들의 욕심 때문이었다. 주변인들이 이 학생을 탓할 때마다 나는 일자리를 창출한 아이라며 자조했다.
어느 날, 이 학생이 전학 온 반의 옆반 교사가 다급하게 이 학생이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해서 교실에 갔더니 담임을 향해 내가 살면서 들어본 온갖 욕을 다하고 있었고, 제지하는 나에게도 그 욕을 다 뒤집어씌웠다. 그 학생에게 맞아가며 겨우 보호자 차에 태워 하교시켰다.
그 뒤로 이런 일이 불규칙적으로 자주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그 학생을 분리하기 위해 내가 출동했다. 온갖 욕과 폭력을 뒤집어쓰면서 억울한 일은 당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학교 안팎에 있는 CCTV 근처에서 그런 일을 당했다.
그런데 이런 학생을 자원봉사자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얼마 안 되는 봉사료로 일할 사람은 연세가 많은 분들밖에 없다. 그런 분들이 손주 뻘인 학생에게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욕을 듣는다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런 학생들에게 맞기라도 한다면 뒷감당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격분하여 학생에게 손찌금이라도 하면, 아동학대니 뭐니 하면서 당할 충격은 또 어떡할까?
내가 겪은 학생을 특수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초등학교 고학년 학생들의 신체 발달은 예전과 너무 달라서 교사와 진배없거나 우월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여교사의 경우는 더하다. 여교사를 차별할 의도가 아닌 진화론과 생물학적인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학교 현장의 문제를 덜어주거나 해결하기 위해서 교육청은 당연히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그 정책으로 학교가 떠안아야 할 문제가 더 생긴다면, 그런 정책을 만들 때 그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예상하고도 생색내려고 감행한 것인가? 둘 다 능력 부족이다.
정책이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 없다. 정책을 마련할 때와 시행할 때의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국가 예산으로 운영되는 교육청은 국가의 상황대로 달라지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마련할 때의 상황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으로, 아니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도 포퓰리즘으로 시행했다면 그 책임까지 질 출구전략을 마련했어야 하지 않는가? 책임지기 싫어서, 애초부터 책임질 의도가 아니어서, 고작 한다는 게 학교에게 변동해야 할 강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여 변동 의견서 제출을 종용하며 학교더러 책임지라는 것인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일만 하라.
그래도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면 같은 편이었다는 인정에 호소하라.
그게 사람을 위하는 정책이다.
사족: 어른들의 민낯을 드러내는 그 학생에 대한 글을 따로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자원봉사자를 위촉하기보다 그냥 내가 맞고 말 것이다. 그게 교감인 내가 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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