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월 1일에는, 그러니까 2026년 3월 1일에는.
교장 발령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 상식적이고 보편적이라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그렇게 되어야 하는 불안하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빨리 보내려 애쓴다.
교장을 하면 교육 희망이 보일 것이라는 생각, 교육을 위해 내 신념을 한껏 펼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손꼽아 그날을 갈망하지 않는다. 다만.
나름대로 어두운 터널에 작은 전등 하나 달겠다는 마음으로 검은 전선을 깔다가 천장에서 시나브로 떨어진 철벅거리는 웅덩이에 미끄러지고 크고 작은 돌부리지에 넘어지고 급기야 터널벽의 돌옹이에 머리를 세게 쥐어박히고는 검은 전선 놓쳐버리고만 그 터널에서 이제는 좀 벗어나고 싶다, 전등을 달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없다.
하루하루를 빨리 보내는 습관적인 생활에 젖어서 마주하는 현실을 마다하는 비겁한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아서, 쓰다만 소설을 쓰겠다는 OTT에 심취하겠다는 잦은 여행을 하겠다는 운동이나 열심히 하겠다는 이제 막 교감된 후배의 말대로 어떻게 하는 게 건강이나 잘 챙기는지도 모르면서 건강이나 잘 챙기겠다는 짧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늘 그랬던 것처럼 읽고 쓰고 걷는 것에 더 충실하자, 2018년부터 쓴 교감일기를 천천히 정리하자고 마음을 굳혔다. 허나.
정신이 혼미해지면 잠 대신 찾아오는 원망의 상념과 잡념의 뿌리인 남탓하는 억눌려 있던 못난 마음이 찾아오고, 목덜미에 힘 빼며 흘려보내려 애쓰고.
그렇게 지루하게 바쁜 하루하루를 훌쩍훌쩍 보내며 맞이한 4일이라는 연휴, 여느 때와 달리 꽤 길겠다는 쾌감이 일었었는데 연휴는 사람의 심리 상태와 상관없이 늘 짧은 것인지 벌써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아직.
내년 3월은 멀기만 한데.
김영랑에 푹 빠졌다가, 강진의 김영랑 생가에 꼭 가봐야겠다는 단단한 결심을 했고, 나는 아내 말에 의하면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왔다갔다하는 사람인지라 여간 마음을 단단히 하지 않으면 초심을 쉽게 잃어버린다. 의아스러운.
그 당시 시인들은 교과서를 벗어나서 여기저기서 재평가되고 있는데 왜 김영랑은 아직도 교과서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갇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저항시보다 순수시를 지향해서일까? 아니야!
강진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지 않은가?
유지의 아들이어서 그럴까? 아니야!
남의 재산을 갈취하여 재산을 축척했다는 말은 없었는데. 나는.
그가 지향한 순수 시문학과 그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 그의 삶이라면 저항시이어야 이념적이어야 하고 그의 순수 시문학이라면 그의 삶은 아픈 민족에 나몰라라하고 해 뜨는 강진만과 해지는 강진만을 노래했어야 하는 상식에 어긋난 삶이 완벽해서 극적 재미가 없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의심을 한다. 아니다.
그는 민족과 나라, 그의 문학을 위해서 극적으로 열심히 살았다, 몇 안 되는 그의 삶의 흔적을 잠깐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이왕이면 모란이 허드리지게 피는 날에 김영랑 생가에 가자고 아내에게 말했는데, 요즘.
아내는 판소리 경연대회에 빠져들어서는 5월 4일 서편제보성소리축제에 참가 신청을 했다며 그날에 가자고 했다.
운전 기사 해주면 강진에 가겠다는. 그때쯤이면 모란은 이미 다 지고 없을 게 뻔한데도 5월까진 핀다는 나무위키의 설명을 아내에게 말했다.
단단히 경연 준비를 한 아내였기에 심사위원의 낮은 점수에 꽤 실망한 마음을 위로할 재간이 없어서, 전날 밤 아내의 꿈과는 다르게 경연 순서를 두 번째로 뽑아서 일찍 경연이 끝난 아내의 의상을 잘 받아서 차에 싣고는 아내가 있는 경연장에 가지 않고 카페라테 한 잔 시켜 책을 읽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아내가 카톡으로 확인한 내가 있는 카페로 와서는 다른 사람보다 점수가 낮아서 등수에 들지 못하겠다며 김영랑 생가로 가자고 했다. 나는 사실대로 앞사람보다 소리가 카랑카랑해서 등수를 기대했다고 하니 뒷사람들이 아주 잘해서 자기 점수로는 안 되겠다고 했다. 같이 참가한 팀에서 자기 점수가 제일 낮다고 하길래 당신이 경력이 제일 낮잖아라고 말하고 그걸 후회했다. 정약용은 사의재기에서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고쳐야 한다고 했다. 그걸 좀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김영랑 생각을 보고 사의재에 들러서야 알았다.
김영랑 생가 입구의 길쭉한 펜 앞에 서보란다.
아마 빛을 반사하는 펜촉으로 내가 출근 전에 시를 필사하는 만년필의 펜촉을 떠올렸나보다.
김영랑 생가의 모란은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손가락을 오므린 채 새파란 잎이 빨아올린 기운으로 쫙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란은 이미 졌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어서도 그랬겠지만 김영랑 생가의 위치가 내가 둘러본 다른 생가터와는 확연하게 달라서 감탄하느라고 모란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잊었다.
꼼꼼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여러 번 고층 건물이 없었을 그때를 상상하며 뒷짐 지고 먼 강진만을 바라봤다. 야, 이 집터 정말 좋다!
김영랑 동상 옆에 폼 잡아 앉아서 시문학파 동상 사이에 서서 사진 한 장씩을 찍고 전시장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북카페에도 들어갔었는데 별다를 게 없었다. 문학관 같은 곳에 오면 늘 아쉬운 건 원본의 영인본과 도서관에서만 구할 수 있는 연구 자료를 살 수 있기를 바라는데 그런 곳이 없다는 것이다. 돈이 좀 들어도 그게 문학관의 차별화다. 시끄럽게 붐비는 이런 곳의 북카페에서 진심으로 책 읽을 이가 나 빼고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내가 말려서.
아내가 입구의 한정식집에서 점심을 먹자고 하길래 사의재의 주막에서 먹자고 했다. 사의재기를 천천히 읽고 주막 메뉴를 보았는데 군침 도는 음식이 없었다. 아욱국을 좋아하지 않는데 정약용 흉내 내려고 먹는 게 상술에 넘어가는 것 같기도 했고. 사의재의 주막에 앉은 아내 사진을 몇 장 찍고 배고프냐고 물었더니 굳이 먹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사의재 옆 작은 연못의 정자에 앉아 개구리 소리 같지 않은 양서류가 주고받는 소리에 맞춰 동네 협동조합 가게에서 산 까슬까슬한 빵과 여동생이 어머니 드시라고 사놓은 고소한 두유를 막걸리와 파전이라 생각하고 운치 있게 먹었다.
우물이 있었는데, 그 옛날 동네 사람의 마실 물이 이제는 관광객을 맞이하는 고마운 마중물이 되고 있었다. 우물이 그 옛날의 영화를 아쉬워할지 그래도 그날을 기억하려는 노력을 가상해할지 모를 일이다.
그냥 집으로 돌어가려는 내가 아쉬운지 아내가 강진 하루 코스와 반나절 코스 관광 안내도를 한참 보고 있어서 그냥 집에 가자고 했더니 오면서 본 큰 불상과 많은 차와 사람이 모여 있던 그 절로 가보잖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걸 선명하게 흘리면서.
사람 많은 게 싫다며 아내가 그 절을 인터넷으로 검색한 후 보고 싶어 하는 그 절의 유명한 수서해당화도 이미 다 졌을 시기라며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거부했다. 예전 같으면 다 들어줬을 텐데 아내도 한 번 더 가보자고 했을 테지만 차 속도와 거리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내 눈 상태를 나도 알고 아내도 아는지라. 그걸 굳이 말하기 싫어하는 내 마음을 아내도 아는 지라 비좁은 고속도로를 널널이 가려는 차 앞으로 끼어드는 차들로 급제동하며 이제는 이런 일에 익숙해진 아내가 운전하겠다는 걸 새겨듣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보다 아무거나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려고 읽던 책을 마저 읽은 허전함을 채우려고 노트북을 켰다. 어느 날 깨어보면 내년 3월 2일에 출근하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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