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간섭

교감이 되기까지

멋지다! 김샘! 2018. 2. 20. 14:22

내 삶과 내 글이 다른 경우가 많습니다.
내 글은 정의를 지향하지만 내 삶은 정의와 거리가 먼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글로 쓰고 공유하면 좀 더 정의로운 삶을 살지 않을까라는 희망으로 글을 씁니다.
시대의 아픔을 딛고 존경받는 지성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가장 큰 이유도 좀 더 정의로운 삶을 살고 싶은 강한 욕망 때문입니다.
교감이 되기까지 바람직한 교사였다고 자부하지 않습니다. 숨기고 싶고 지우고 싶은 기억도 많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변명하며 삽니다.
 
나를 포함한 반교장문화를 지향하는 교사들이 지탄하는 교감이 되기 위해 점수를 얻은 과정을 중심으로 씁니다.
 
첫 발령을 버스로 출퇴근이 되지 않는 곳에 받았습니다. 자가용이 있었다면 출퇴근이 충분한 거리였지만 1993년은 자가용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신규교사 자가용을 갖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자취방에 오면 책을 읽는 것 말고는 아무 할 일이 없었습니다. NEIS가 없는 시절이어서 교사용 지도서, 새교실, 진보 교육학, 열린 교육에 관한 책을 읽는 것 아니면 텔레비전을 의미 없이 보는 것이 전부였고 자주 친구들, 선배들과 술을 마시는 것 또한 퇴근 후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월급으로 첫 월급보다 더 비싼 비디오카메라를 샀습니다. 대학 방송국 출신이라는 소박한 의무감으로 수업에 필요한 영상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학교는 학교방송실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원 없이 촬영과 편집을 할 수 있었고, 수업연구대회나 자료전에 출품하는 선배들을 돕는 것이 큰 보람이었습니다.
컴퓨터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래픽 툴이나 오피스를 꽤 빨리 통달한 교사일 것입니다. 교육용 소프트웨어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수업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직접 제작하여 사용했습니다. 학교에서 내 교실에만 별도의 전화선을 설치해줘서 인터넷도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정보화 교실로 이름 지어졌기 때문에 많은 손님들의 방문을 받아야만 했지만 보람 있었습니다.
선배들을 도와주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소프트웨어 공모전에 출품했습니다. 외국의 훌륭한 저작 툴이 아닌 국내 소박한 기억의 저작 툴로 소프트웨어를 만들었습니다. 내 수업에 사용할 수 있도록 제작했기 때문에 입상에 대한 희망도 있었지만 탈락에 대한 아쉬움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도대회에서 1등급을 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때 내 실력이 괜찮다는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그 뒤 나의 장기인 동영상이 중심이 된 소프트웨어를 다수 출품하여 전국 1등급을 받았습니다. 물론 대회용보다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일반화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렇게 교감이 되기 위한 연구점수가 다 채워졌습니다.
 
연구학교는 점수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가능하면 동기들이 선호하지 않는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대학 성적이 꼴찌에 가까웠지만 교사로서 부족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었는데 대학 성적을 아는 주변 분들의 선입견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관리자나 학부모들이 힘들다고 소문난 학교여서 연구학교를 해도 다른 교사들은 선호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방송국과 정보화 기기들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2년 동안 교육부 시범을 하는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옮기려고 했는데 관리자와 선배들이 말렸습니다. 지금 생각과 나중은 다를 수 있으니 굴러온 복을 일부러 차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찼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예년 같으면 충분히 옮길 수 있는 점수였는데 그 해는 점수가 높아져서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연구학교 점수가 다 채워졌습니다.
그리고 겁난 관리자와의 학교생활은 힘이 들었습니다. 대들기도 여러 번 했고, 우기기도 했고, 뒤에서 욕도 많이 했고, 아부도 하고-다른 교사들은 내가 아부를 못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나 사실 나는 아부를 잘합니다. 이른 나를 발견할 때마다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 침묵으로 버티고 불참으로 반항도 많이 했고, 노래방에서 마이크 집어던지지도 했고, 때로는 정의롭지 못한 행동에 동참했습니다.
변명이지만 이런 과정에서 교사로서의 자아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좋게 포장하면 시대와의 조우로 정의로움에 대한 내적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자존감을 가지게 된 것도 그 시대와의 조우에서 얻은 내적 성장의 결과라고 자신합니다.
 
영재교육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공문에 의해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방송국 아이 중에 컴퓨터에 굉장한 소질을 가진 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를 가리키면서 외국의 영재교육에 관심을 가졌고 우리나라에도 도입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몇 년 뒤에 영재교육이 도입되었습니다. 교육지원청 영재 강사로 선발되어 토요일 수업 후에 영재성이 있는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주 5일 근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제일 힘든 것이 방학에도 프로젝트 수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보람은 충분했습니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아이들에게서 희열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뒤에 영재원 담임을 하면 승진 가산점을 주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많은 영재 강사들이 이 규정에 반대했습니다. 영재 강사들의 자발성에 의한 열정이 사라지고 영재성 아이들을 선발하는 조건도 객관성을 너무 강조하여 제대로 선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우려가 현실이 된 지금의 영재교육원을 보면 아쉬움이 많습니다.
1세대 영재 강사였기 때문에 0.2 가산점을 빨리 얻었습니다. 결국 빨리 얻은 점수 덕분에 좋아하는 영재교육은 더 이상 할 수 없었기도 합니다.
파견교사를 희망하였습니다.
방송미디어 부분이었는데 이것을 준비하기 위해 별도의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들과 방송국 운영하는 것을 워낙 좋아했고, 동영상 촬영과 편집으로 수업자료 및 학교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일이 일상으로서 보람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덕분에 파견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0.5 가산점을 얻었습니다. 물론 가정과 떨어지는 합숙생활의 고단함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많은 접촉과 새로운 환경의 생활에서 학교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강한 성찰과 변화를 위해 필요한 공부를 시작한 계기가 되어서 파견교사를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냅니다. 학교 밖에서 학교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모든 교원에게 주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농어촌 점수는 자연스럽게 얻었습니다. 시내 근무 연한이 10년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의지와 관계없이 농어촌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내 방송국 있는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고 싶어서 시내 연한을 끝까지 채운 것이 동기들보다 교감 자격을 주관적인 입장에서 조금 늦게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1급 정교사 점수는 평균이었습니다.
직무연수 점수는 좋아하는 전국 단위의 영재교육 직무 연수에서 얻었습니다. 이 직무 연수 점수가 교감 발령받는데 연한이 다 되어서 좋아하는 한국사 연수로 다시 직무연수 점수를 얻었습니다.
 
학폭 점수도 무리 없이 얻었습니다.
실제로 아이들과 함께한 생활을 근거 자료로 활용했습니다. 다만 승진에 필요한 선배를 위해 후배와 동료의 배려가 있었다는 것은 미안하면서 고맙기도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근평은 교무를 하면서 얻었습니다.
교무로서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근평을 얻자는 소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무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관리자는 이런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근평을 주었습니다. 교사 끝부분에 동료 평가의 오해로 속이 상하는 일이 있었는데 아첨하지 않았습니다. 관리자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기에 근평을 꼭 받아야 되겠다고 했습니다. 유쾌한 경험이 아니라서 이분들을 일부러 멀리하지 않지만 불편한 것은 조절하지 못하는 감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감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내가 늘 품고 있는 '왜 교사인가?'의 의문과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왜 교사인가에 충실히 답한 결과로 교감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교감이 되기 위해 컨설팅을 요청하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 후배들에게 '왜 교감이 되려 하는가?' '왜 교사를 하는가?'를 먼저 묻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감정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고 '왜 교감이 되려 하는가?'와 '왜 교사인가?'를 일치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라고 조언합니다.
 
예전의 글에서 교감 자격 연수 과정을 비판했습니다. 교사들이 원하는 자격 과정과 거리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마음 여전합니다. 교감 자격 연수는 그야말로 교감이 되는 자격에 불과하다는 생각 여전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교감이 될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거부한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이 우리가 바라는 교감이 될 수 없는 조건이라 하여 피한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는 교감들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어제저녁에 교감하는 친구와 제법 많은 술을 마셨습니다.
친구가 걱정스럽게 나의 반교장적인 성향을 걱정하고 우려하는 선배들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며 친구가 나대신 변명을 많이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고맙기도 했지만 선배 교감과 교장이 왜 나를 걱정하는지 이해할 듯하면서 납득은 안 되고, 교감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내가 저지른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다른 관리자들에게 전가한 적도 없는데 그런 불편함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억울함은 숨길 수 없었습니다.
 
나의 잘못을 숨겨달라고 부탁하지 않습니다. 성장이 덜 된 인간이 저지른 잘못도 잘못이기에 피해자가 있다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인간 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전의 정의롭지 못한 언행을 비난하면 감내하는 것도 지난날의 잘못을 책임지는 태도라고 것도 잊지 않습니다.
 
부탁합니다.
인간의 성장합니다. 교사도 성장합니다. 방향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향이 다르다고 나는 성장했고 다른 이는 성장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현재의 그 사람을 과거의 과오로-용서받지 못할 과오는 제외- 판단하는 것은 삼가면 좋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어떤 교감이 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맞게 잘하려는 마음만 가득합니다.
그리고 소소한 결과들을 교감 일기로 성찰하여 상황에 맞는 지혜를 얻고자 합니다.
 
친구들과 헤어지며 가칭 '교감들의 수다'를 책으로 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교육 현안을 보수교육을 지향하는 친구, 나름 진보교육을 지향하는 나, 극단적인 중도를 지향하는 또 다른 친구의 대화록을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모두 찬성은 했는데 술 마시고 한 약속이라 이행으로 이어질지는 의문입니다.
 
'왜 교사인가?'와 '왜 교감이 되려는가?'를 일치시키기 위한 나름의 교사 시절이었습니다.
나의 행동을 오해 없이 긍정적으로 살펴주시고 지원하고 지지해 주신 교감, 교장선생님들 고맙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동료들에겐 언제든지 사죄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자만적인 성취의 기쁨보다 물러서지 않고 버텨 온 대견한 나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며칠을 보내고 싶습니다.

상황에 맞게 잘하는 교감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