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궁금했다.
교육자 출신 문학인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학교 현장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지 않았다.
교육자 출신 정치인이 있다.
그들 역시 교육 현장의 모순을 해결하기보다는 야망을 이루려 현장과 갈등했다.
왜 학교 현장 출신이 있는 그대로의 현장을 대변하지 않을까?
그냥 그렇게 하고 있다.
뛰어난 교사는 아니었지만, 교사의 삶과 지식으로 현장인 학교를 알리며 나름대로 개선하자는 의지를 몇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그 책들의 근간에는 심리학, 사회과학, 뇌, 자기 계발, 리더십 등의 이론과 내용이 흐르고 있었지만, 설명문과 논설문이 아닌 수필에 가까웠다.
교감을 잘하려고 교감(校監) 일기를 썼다. 지금도 쓰고 있다.
이왕이면 일기로 갑론을박하며 공감대를 형성하면 학교가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랐다.
일기를 쓰는 동안 읽기와 쓰기를 멈추지 않아서 교육을 바라보는 시야가 학교 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교감(校監)을 시작하며 나에게 제기한 ‘과연 교감(校監)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대답할 수 있었다.
법령,, 문화가 정의한 교감(校監)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내가 재정의하고 싶은 교감(校監) 존재 가치였다.
‘교감(校監)은 교감(校監)이 해야만 하는 업무만을 처리하는 교원이 아니다.’
‘교감(校監)은 교장과 교직원 간의 갈등 해결과 중재자 역할만이 아니다.’
‘교감(校監)은 교사의 수업과 업무를 지원하는 게 최선의 선이라는 틀에 묶여선 안 된다.’
‘교감(校監)은 본인의 지식과 지혜로 장학 활동을 하는데 스스럼이 없어야 하고, 더군다나 포기하면 절대 안 된다.’
‘교감(校監)은 학교의 진보뿐 만이 아니라 교육을 통찰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활동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지금 내가 가진 지식과 덕으로 찾은 대답이다. 그냥.
무엇보다 교감(校監)이 교사를 도와야만 된다는 강박으로 교사의 업무와 수업을 거들면서 장학 활동을 하지 않을 때, 교육자로서의 교감(校監)의 존재는 상실한다.
일부지만 권력을 쥔 교육감, 장학관, 장학사, 교사들이 교감(校監)의 장학활동을 배제시키며 ‘전문적 학습공동체’라는 학교 공동체 안의 실체가 묘연한 공동체를 만들어 수업 혁신을 꾀했다.
특정한 능력만이 모인 공동체의 집단 지성의 결과가 진보적이라, 총합, 통합, 융합, 혁신이라 할 수 있나?
제한된 능력의 집단 지성의 만용으로 학교에서는 ‘전문적 학습공동체’의 무용론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교감(校監)은 이처럼 학생의 성장을 저해하는 학교 현장의 모순을 스스럼없이 지적하고 개선해야 한다.
문학을 하려 한다.
구체적으로 소설과 시를 쓰려고 한다.
학교 현장을 내가 드러내는, 교육을 내가 보고 느낀 대로 소설부터 시작한다.
이미 ‘로봇으로 산다는 건’이라는 소설을 썼다.
학교 현장의 문학으로 교육 모순을 극복하는, 교육 본질로 미래를 지향하는 교육 담론을 형성하고 싶다.
그냥 그런 일을 한 번 해보고 싶다. 무모하게.
이 또한 내가 생각하는 교감(校監)의 존재 가치다.
여름방학인 조용한 학교를 지키며 졸음을 쫓아내려 뒤돌아보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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