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9

2025년 5월 12일

지난주에 어머니의 건강이 갑자기 나빠져서 이런저런 고민 끝에 집 근처의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다행히 한 고비를 넘겼는데 두 발로 설 수 없어서 내내 침대에 누워 계셔야 한다. 자기 고집과 자존심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센 분인데 기저귀로 대소변을 해결하려면 억장이 무너질 것이다. 그 마음을 상상하니· · · · · · 돌아버리겠다. 함께 살 동안에는 몰랐는데, 작년의 치매 검사에서도 치매 판정을 받지 않았었는데 정신도 온전하지 않다. 기력을 회복하여 예전처럼 의료기에 의지하여 엉거주춤하게만 걸어도,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집으로 퇴원할 수 있는데, 하루하루 지켜볼 수 밖엔 다른 방법이 없다. 몸은 잘하려는 마음을 늘 따라가지 않고, 남들은 아들이라도 어머니에게 살갑게 잘하더니만 나는 왜 이러는지. 병상..

좋을 때다, 무슨 걱정이 있을까.

나의 초등학교 시절은 1970년대 말과 80년대 초였다오전 수업을 마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는 어김없이동네 골목에 모여 깡통차기와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온 동네의 장독대와 헛간 외양간 뒷간 집과 맞닿은 대나무밭을 누비다가 심지어 어떤 아이는동네 뒷산의 양지바른 무덤 뒤에 숨고는 잠들어버리기도 했다해가 저물며 앞산이 어둑해지고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이 집 저 집에서 같이 놀던 친구와 동생들의 이름을 불러대며저녁 먹으러 오라 했다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며 숙제는 다했는지 엊그제 본 시험지를 부모님께 보여주었는지 학교에 낼 돈 얘기를 했는지를 걱정했다 그런 우릴 보고 어른들은좋을 때다 무슨 걱정이 있을까그런 소릴 들은 우리는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어른들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로 속삭이듯 받아쳤다1990년대 말과..

2025년 1월 1일

또다시 맞는 새로운 해의 첫날이다.별 의미를 두지 않고, 사실 별 의미를 두지 않으면 안 되면 결혼기념일이다.결혼 30주년까지는 무던하게 넘어가자는 아내가 정말 고맙다.책을 좀 보다가 내려놓고, 집안 청소를 끝내며 1차 선물이고 커피를 내려주곤 2차 선물이라고 했다.이렇게만 하면 다른 친구들은 큰일 난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냥 이렇다.오래전에 함께 근무해던 후배가 말과 표정과는 다르게 행동이 친절해서 오래 기억되는 사람이라며 카톡으로 안부를 전했다.말과 표정과는 다르게 행동이 친절하다, 두 가지를 다 가졌으면 좋으련만 늘 듣는, 보이는 것보다 부드러운 사람이다,라는 말과 비슷한 뜻이겠지.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소리 높여 틀어놓곤 2025년을 의미 없이 그려본다.내란과 탄핵 정국이 빨리 내가 원..

2024년 3월 4일

아내가 학습연구년 일 년을 마치고 집과 가까운 학교로 옮겨 근무한다. 내 출근길에 있는 학교라서 다시 함께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교사 자질이 충분하면서도 교사 자질이 없다며 학생을 가르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아내다. 하루이틀이 아닌 결혼할 때부터 학생을 가르치는 게 정말 부담스럽고, 특히 학부모와 동료 교원을 상대로 공개 수업을 하는 게 제일 부담스럽다고 했다. 그런데 노래와 판소리 공연을 할 때에는 하나도 떨리지 않는다고도 했다. 학생 가르치는 게 부담스러워서 퇴근하면 늘 다음 날 가르칠 수업 준비를 한다고 컴퓨터를 독차지했다. 개학을 앞둔 요 며칠간도 컴퓨터를 점령하고 있기에 내가 사용할 노트북을 주문했다. 그렇지 않아도 퇴근 후에 운동한 후 지금보다 더 꾸준히 글 쓸 결심을 하며 인터넷 쇼핑몰 장..

2024년 1월 9일

학생을 위해 급식하는 학교는 방학이면 급식을 하지 않는다. 방학에 출근하는 교직원은 방학이 다가오면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지를 크게 고민한다. 어떤 학교는 각자도생, 어떤 학교는 십시일반 가져온 반찬과 도시락으로, 어떤 학교는 늘 출근하는 사람끼리 학교의 마땅한 장소에서 대충 해서 먹는다. 나는 혼자서 그때마다 먹고 싶은 김밥에 라면, 빵과 커피, 평소 먹고 싶었던 편의점 도시락, 고구마, 떡, 주전부리 등으로 해결하는 걸 즐긴다. 그러다가 기분이 내키면 종없이, 어떤 때는 교감의 위신을 세우려고 점심을 산다. 오늘은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다. 교감이 되어서 처음으로 보온 도시락을 가방에 넣어오는 기분은 초등학교 다닐 때 일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계란후라이를 밥 위에 얹고 달걀물에 적셔서 구운..

2023년 1월 28일

아내가 정기적인 모임을 하는 분들과 뮤지컬 관람과 친목을 위해 서울로 1박 2일 여행을 간다. 고속버스 터미널에 태워주면서 일행 두 분을 중간에 태워 가자고 했다. 내가 아는 분들이라 그러자고 했다. 한 분은 교사로 명예퇴직을 한 후 기초학력 향상을 위한 강사를 하고 있고, 한 분은 나름대로 학교 변화를 위해 애쓰는데 사실 학교 변화를 위해 애쓰는지 자신의 입신을 위해 애쓰는지 많이 헷갈린다. 학교 변화를 위한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서 학교 일을 다 안다는 자만만으로 자기주장이 옳다며 고집하는 이분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가 이분과 모임 하는 것도 싫다. 중간에 두 분을 태웠다. "김 교감 우리까지 태워주고 고맙소." "아닙니다 나이 들수록 마누라 말 잘 들으려고요." "참 생각 잘했네." "선생님 요즘도..

2021년 7월 2일

어제는 생일이었다. 두 아들이 공부한다고 떠난 뒤에는 집안 기념일이 더 쓸쓸하다. 아내는 이런 쓸쓸함을 메우기 위해 둘째 아들이 군대에 있음에도 가족 단체 카톡으로 생일 축하를 알렸다. 큰아들은 축하 이모티콘, 작은아들은 스마트폰이 허용된 저녁 시간에 역시 축하 이모티콘을 보냈다. 두 아들을 둔 가정의 단체 카톡방은 무미건조하다. 어머니는, 아내가 차린 생일 고사상에 하나뿐인 아들 잘 보살펴 달라고 신령에게 연신 두 손을 비비시며 허리를 굽신거렸다. 허연 머리에 비녀를 꽂은 어머니가 신령과 진배없는데 어느 신에게 비시는지.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이런 모습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평생 가족을 위해 비시는데 최소한 애는 먹이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생겼다. 퇴근하여 아내와 거실에 앉아..